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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老兵)의 눈물과 마지막 거수경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故 이승복 제49주기 추모제, 강원도 용평 현지에서 19년 이어온 (예)영관장교연합회 주관 마지막 행사로 열려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7-12-14 오전 1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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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2월 9일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5명이 강원도 평창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1학년생이던 이승복(당시 9세)군과 일가족(어머니, 남동생과 여동생) 4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우리 군 ․ 경의 추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며 먹을 것을 찾던 무장공비들이 외딴집 이승복 군의 집으로 숨어든 것이다. 마을 주민의 이삿짐을 날라주기 위해 집을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던 이 군과 맞닥뜨린 한 무장공비가 승복군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 고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다”며 항거하자 공비들은 대검으로 승복의 입을 찢고 돌멩이로 내리쳐 살해했다. 형도 온몸이 난자당한 채 집 마당 퇴비더미에 내던져졌다가 구사일생했다. 이른바 반공소년 이승복 사건이다.

 12월9일 오전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자락.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주인공 반공소년 이승복 군과 엄마, 그리고 동생들이 묻혀 있는 묘역에는 이 날도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이 날 기온은 영하 11도. 하지만 이날도 매년 그랬던 것처럼 묘역 아래 공터에 정렬한 초로의 백발 할아버지들은 미끄러운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올 때와는 판이하게 의연함과 굳굳 함으로 군인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매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9일이면 어김없이 이곳 이승복 묘역을 찾아 어린 반공소년의 영혼을 달래며 ‘이승복 사건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온 노병들이었다. 한파가 휘몰아친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았다. 그러나 이 날의 자리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도 했다. 지난 19년 동안 개최해온 추모행사가 이들 노병들에 의해서는 마지막이 되는 탓이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은 삼천갑자 동방삭도, 진시황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승복 추모 49제에 이르기까지 19년 동안 단 한번도 빠트리지 않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며 자유 수호 의지를 일깨워 온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회장 권오강 ․ 이하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은 차분하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추모제에 참석했다.

 ▲ 기일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권오강 육.해.공군.해병대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 회장. ⓒkonas.net

 

 영관장교연합회가 주최하는 이승복 추모행사에 10여 년 동안 동행 취재를 해온 필자의 입장에서 이번 49제 추모제가 영관장교연합회가 하는 마지막 행사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교차하는 한편, 세상으로 한발자국 더 힘차게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환영하면서도 흐르는 세월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 짠해지는 느낌을 지울 길 없었다.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이 지난 19년 동안 이승복 사건 바로 알리기에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군에 몸담아 안보의 최일선에서 조국수호에 앞장선 회원들은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한 초등학생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사건이 좌파정권의 좌파매체에 의해 (사건보도가)‘오보이며, 조작’이라고 철저히 왜곡 보도됨으로써 국민에게 잊혀지고 외면되자 이를 되살리기 위한데서 부터 시작됐다.

 공비들의 잔인한 만행으로 죽음 일보직전에서 발견돼 살아난 형 이학관 씨를 비롯해 오랜 세월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피폐는 말할 나위 없었다. 이승복기념관과 지자체가 시행하는 추모행사는 형식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장학기금은 유명무실해졌다. 교과서에서도 사라졌다. 초등학교 교정에서 가녀린 몸짓으로 자유의 소중함을 알리던 그의 작은 동상은 파헤쳐져 창고 한편에서 뒹굴거나 땅에 파묻혀졌다. 북을 찬양하는 세력들은 기고만장, 그의 역사적 진실을 지우고자 했다.

이승복 사건 역사 되살리기 나선 (예)영관장교연합회

 바로 그 시기에 우리 군 창설 요원으로, 제주4.3사건을 비롯해 6.25한국전쟁 참전과 이후 무장공비 대침투작전 등에 참가하고 군의 중추적 임무를 수행해 온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이 이승복 사건 알리기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일회성 내지 구호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기일 추모제를 복원했다. ‘이승복 사건 역사 다시 알리기’ 책자를 매회 발간하고 전국 학교 도서관과 정부부처, 국회,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에 배포했다.

 직접 어깨띠를 매고 거리 캠페인에도 나섰다. 이들은 추모제가 끝나면 기념관 어린 이승복 동상 앞에서 꽁꽁 언 손을 녹여가며 결의대회를 갖고 그의 진실의 역사가 복원될 때까지 이승복 역사 알리기를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지기도 했다.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의 이승복 사랑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오직 국가에 대한 무한사랑,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사명 하나였다. 이들 노병의 노력의 결과 지금 추모식에는 지역 내 기관장, 교육관계자, 군 지휘관 등 장병들이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변화다. 군에서도 ‘국군정신교육기본교재’ 에 관련 내용을 수록해 정훈교육자료로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활동은 작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행은 이런 노병들의 활동이 잘 알려졌음인지 지난 2월 (사)이승복평화기념사업회가 발족된 것이다. 이 기념사업회는 내년부터 추모식을 맡아 이승복의 반공정신이 자유와 평화, 사랑의 정신으로 승화되도록 기일 추모식을 비롯해 학술사업과 역사 문화유산 복원 사업 등을 펼칠 방침이라고 한다. 오래 취재를 해온 기자의 입장에서 참으로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생존 침투 무장공비와 만나다

 기자에게 있어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기억은 2009년 12월9일 기일추모제에서 1968년 당시 울진 ․ 삼척지구 침투 공비로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익풍(당시 69세, 평북 선천 고향)씨가 참석한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 쌓인 원한과 앙금이 있었음에도 가족들은 영관장교연합회 주선으로 김씨를 만났다. 그리고 손을 맞잡았다.

 ▲ 故 이승복 묘역앞 젯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는 울진-삼척지구 침투 생존 무장공비 김익풍씨. ⓒkonas.net

 

 그 날 이승복 군 묘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묵념에 잠기던 김씨는 조용히 묘 앞에 술잔을 올리고는 참석한 250여명의 추모객들에게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앞좌석에 앉은 故 이승복 군의 형 이학관씨와 손을 마주잡았다. 이어 그 옆 학관씨 부인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했다. 울진-삼척 침투 생존 무장공비와 그 무장공비로 인해 어머니 등 네 명의 가족이 학살되고,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이상증세로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가족이 41년 만에, 그것도 주검으로 남겨진 그 날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추모제 후 기자와 자리를 함께하며 인터뷰에 응한 김익풍씨는 그해 10월 처음 이승복군이 묻힌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면서 “(당시 희생자들과) 내가 직접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와 보고 싶었다. (참배하며)가슴이 아팠다. 오늘 처음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아니었지만 동료들이 죽인 아이 앞에서 착잡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잘 사십시오 했다’. 내 마음이 그렇다. (이 때 그의 얼굴에는 회한이 서리는 듯 했다)"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김씨는 또 ‘침투 당시의 목적’에 대해 “각종 정보를 파악하고 일개 가옥(가족)이나 집단을 포섭하는 것과 요인을 납치해 대동 월북하는 것 이었다”고 말하고, ‘왜 산골 농부를 포섭할 이유가 있나?’는 질문에는 “북에서는 그런 교육을 받는다. 포섭에 가장 용이한 자가 농촌이나 산 속에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북에서 강원도 울진 삼척은 대한민국에서 못사는 지역 사람으로 보고 이북을 지지하는 계층으로 본다. 구성원들이 또 드믄드믄 산다는 것도 있고, 신고를 안 한다는 장점도 있었고, 전투가 일어나도 무장공비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익풍씨가 묘역을 찾은 그 날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은 서울을 출발한 버스 내에서 그의 참석을 공지하고 현장 즉석 모금활동으로 모은 1백만원을 김익풍씨에게 전달하는 훈훈한 미담을 보이기도 했다.

영관장교연합회의 마지막 추모제, 그리고 남겨진 과제

 올해 이승복 추모 49제에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은 30여 명이 참석했다. 7,8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대형버스 4,5대에 200여 명 이상이 타고 가던 때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차 한 대에도 빈 좌석이 늘어났다. 평균 연령 80이 넘고 최고령 92세 되신 분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할 수는 없었다.

 이 날 권오강 회장은 추모사에서 “지난 18년 동안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엄동설한에 80노구를 이끌고 추모행사에 매년 참석해 주신 회원 여러분들의 헌신에 감사 드린다”며 지난 19년 추모제를 이끌어 온 회원들에게 눈물의 인사를 했다.

 이어 “그동안 오늘이 있기까지 과정들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승복 사건’이 진실(2006년과 2009년 대법원 선고)임이 밝혀지고, 역사의 사실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이제는 고인께서도 모든 것을 잊으시고 편히 잠드시기 바랍니다”고 말을 맺어 참석한 이학관씨 부부와 가족을 포함해 주변을 숙연케 했다. 권 회장 본인도 2014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석에 있었음에도 12월9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날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추모식을 주도했다.

 이제 영관장교연합회의 이승복 추모제는 연합회 역사와 회원들의 깊은 추억 속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새로 발족된 이승복평화기념사업회가 못다 이룬 장학사업이며, 교과서 수록, 학교 교정에 동상 건립, 기념관과 연계한 이승복유적지 활성화, 특히 당장 눈앞으로 다가오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연계 안 등이 과제로 남겨질 것으로 보인다.

 이 날 추모제가 끝나가면서 노병들은 일제히 故이승복군이 영면하고 있는 묘역을 향해 일어섰다.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지난 1999년부터 19년이 흐른 2017년에 이르기까지 정부 당국과 관계요로에 숱한 진정과 방문 면담, 책자 발간, 거리캠페인, 행동표방으로 이승복 사건 역사 되살리기에 앞장선 육․해․공군․해병대영관장교연합회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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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아빠(heng6114)   

    잔악무도한 북한은 이지구상 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2017-12-15 오전 9:19:51
    찬성0반대0
1
    2018.4.21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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