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령을 기려야 하는 이유
호국영령은 말한다,“우리는 조국의 법에 순종해 자유를 위해 싸우다 이렇게 누워 있노라”고.
히말라야 산에 오르는 등반자들은 8000m 높이에 이르면 산소의 소중함을 느낀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산소가 소중하다는 것을 잊고 지내다 산소가 희박해져 숨쉬기가 불편해질 때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나라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산소나 나라나 똑같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공동체는 공짜가 아니다. 이 공동체가 지금처럼 자유와 번영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일찍이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가 말한 것처럼 한 송이 장미꽃을 가꾸는 노력과 수고로움에 비견될 만한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성을 바친 이들이 누구인가. 6·25전쟁 때 포로로 잡혀 아직도 북한에서 귀향하지 못해 고초를 겪고 있는 국군포로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새벽녘의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다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무명용사들은 또 누구인가. 일찍이 그리스의 시모니데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를 2행시를 통해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가서 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그들의 법에 순종해 여기에 누워 있노라고."
6·25전쟁 때 군번도 없이 싸우다 숨져간 학도병들이야말로 5만 명의 페르시아대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전사를 닮지 않았는가. 그들은 오늘도 국립묘지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법에 순종해 자유를 위해 싸우다 이렇게 누워 있노라”고.
비록 정전으로 귀결돼 전쟁 이전과 별다른 영토의 변화는 없고 지금까지 분단상태는 지속되고 있지만, 6·25전쟁은 남침한 북한에 맞서 남한이 싸웠다는 민족상잔의 차원을 넘어, 또 냉전 체제하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팽창 의도에 맞서 미국 등 국제연합이 싸운 국제전이라는 성격을 넘어서서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북한 전체주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남한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시장질서를 방어한 전쟁이다.
이런 6·25가 ‘잊혀진 전쟁’이 될 수는 없다. 만일 6·25를 잊는다면, 이 전쟁의 와중에서 청춘과 목숨을 바쳐 ‘불멸하는 민족혼’이 된 그들에게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달콤하고 품위 있다(dulce et decoum est mori pro patria)”고 읊은 로마의 호라티우스의 시를 목숨을 바쳐 현실 속에 구현한 용사들이 아닌가.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번영, 인권이 그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국가는 주권과 영토, 국민으로 이뤄진 존재다. 하지만 엄밀하게 생각하면 나라는 이 정도의 명제만으로는 충분히 담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살과 피, 몇 개의 뼈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명제로 표현할 때처럼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 아쉬움을 남긴다.
국가는 단순히 주권과 영토, 국민을 넘어 영혼을 가진 존재다. 어네스트 르낭(Ernest Renan)도 “국가는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영혼’으로 존재하는 국가공동체는 국민들에게 자존감과 정체성, 정신적 뿌리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바로 이것이 국가의 영혼을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친 호국의 영령들을 영원히 기려야 하는 이유다.(konas)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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