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직접 시위대 만나 설득해야
밤마다 서울 도심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더니 급기야 엊그제 시위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평화로웠던 촛불집회가 폭력으로 변질된 것은 "비폭력을 주장하려면 집에나 가라"고 외치는 시위대의 독선과 과격성 때문이다. 이 통에 죽어나는 것은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는 피해자들이다. 정부는 국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 대대적인 반격을 할 요량인가. 그것은 비겁한 위계(僞計)일지언정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자세는 아니다. 1150만 표를 얻은 정치가의 자신감과 나라의 품격을 높이겠다는 의지는 다 어디 갔는가.
정부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있다. 경제를 살리고 싶어도 국제환경이 열악하면 어쩔 수 없다. 원자재 값도 오르고 유가도 급등하는데 어떻게 '747'을 띄운단 말인가. 그러나 법과 질서의 문제는 다르다. 바로 그것이 정부가 존재하고 국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민주화'는 되었으나, '법치화'는 되지 못했다. 법치는 '공안정국'이나 '억압'이라는 말과 오버랩될 만큼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그랬기에 시위대가 경찰에 격렬히 맞서는 현장에서 공권력의 사용만으로 법치가 살아 꿈틀거릴 수는 없다. 경찰을 시위대가 포위하여 구타와 욕설을 해대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권력의 엄숙함이 느껴질 것인가. 공권력의 왜소함이 느껴질 뿐이다. 물대포로도 법치는 살아날 수 없다. 유모차를 모는 엄마가 물대포 앞을 막아서는데 어떻게 물대포가 위력을 가지겠는가. 또 연일 공권력을 '과잉진압'이라고 주장하는 야당과 방송이 있는데, 시위대가 쇠파이프와 쇳조각을 사용한다 한들 어떻게 죄책감을 느낄 것인가.
법과 질서는 무법상태를 걱정하는 언론의 논조나 논객들의 힘으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대선 불복종 세력이 저항권을 들먹이며 법을 강조하는 언론이나 논객에게 '보수'라는 딱지를 붙여 비아냥거리는데, 어떻게 '질서가 아름답다'는 말이 먹히겠는가.
이런 상황이라면 대통령의 각오는 남달라야 한다. 대통령이 법의 수호자로서 결연히 나서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서 노심초사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광화문 시위대들을 향해 간곡히 호소해야 한다. "쇠고기 협상은 국익을 위해 서두르다 보니 잘못되었다.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어려우니 정부와 국회를 믿고 생업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청와대에서 시위대의 촛불만 보면서 상념에 잠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때 일선경찰서를 찾아가 범법자의 검거를 지시하던 대통령의 모습은 당당했다. 이제 법과 대의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간절하게 들려오는데, 대통령이 시위대들에게 쇠파이프를 버리라고 직접 호소하면 시위대들이 외면만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소통이 중요한 시대다. 그렇다면 대통령 자신이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들과 소통을 잘했던 정치인에게 붙였던 애칭인 '민중들의 친구' 즉 '포풀리콜라(populicola)'가 되어 시위대들을 설득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시간이 가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부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일찍이 영국에서 대독(對獨) 항쟁을 지휘했던 프랑스의 드골이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무정부 상태였다.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각 정파가 난립했고 그중에는 드골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드골은 위험을 무릅쓰고 개선문 광장에 우뚝 섰고, 자신을 의심하던 세력을 감동시키고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지금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서울 도심에서 우리 대통령은 어디 있는가. 우리는 무너지는 법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사리기보다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는 대통령을 간절히 원한다.(http://news.chosun.com)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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