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이승만과 '48년체제'의 위대한 遺産 ①

Written by. 이주영   입력 : 2008-07-29 오전 9:12:00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0

 이승만(1875∼1965)은 생애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역할에 있어서도 서독의 아데나워(1876∼1967)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지도자는 생존 연대도 비슷했고, 집권기간도 거의 같았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는 드물게 최고의 학력인 박사 학위를 가졌다.

 '文明史的 전환'의 주역

 무엇보다도 두 지도자는 모두 자기 나라의 문명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두 인물은 자신의 조국이 '대륙 문명권'에서 벗어나 '海洋文明圈(해양문명권)'에 편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지도자는 미국 지배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또는 '글로벌리즘' 시대의 출현을 일찌감치 간파한 문명의 先覺者(선각자)들이었다. 그러한 세계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서독은 대서양 건너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 결합을 이룩해야 했고, 대한민국은 태평양 건너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인 결합을 이룩해야 했다. 그 때문에 아데나워는 '대서양주의자'로, 이승만이 '태평양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함에 있어서 이승만은 아데나워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겼었다. 국력, 국민수준, 주변국들과의 관계, 무력 충돌의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서독 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익숙해 온 공동체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낯선 개인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을 새로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은 새로운 해양문명에 적응하는데 성공했고, 그 대가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개신교는 선진문명의 도입 수단

 이승만은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종교가 문명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 때문에 충돌하게 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새뮤얼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충돌론 자였다. 두 사람은 모두 종교들 가운데서 기독교가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져온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에게 개신교는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의 통치기에 개신교는 국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정부의 각종 국가의전은 기독교식으로 집행되고, 미군정기에 정한 크리스마스 공휴일도 그대로 지켜졌다. 국기에 대한 경의는 경례대신 주목례로 바뀌고, 형무소와 군대에는 「형목제도」와 「군목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기독교방송국과 극동방송국이 인가되고, 국영 중앙방송국을 통한 기독교 선교도 묵인되었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여, 그의 12년 통치기간에 임명된 135명의 장관급 부서장 가운데서 개신교도가 47.7%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발탁에는 그의 종교적 편견도 있었겠지만, 개신교가 일찍이 해양문명에 필요한 새로운 엘리트를 양성해 놓은 사실도 작용하였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패전국, 분단국, 약소국에게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NATO에 가입함으로써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이승만도 미국, 대만, 필리핀 등을 묶어 동아시아판 NATO를 결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미국의 반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NATO의 기본 정신을 대한민국에 만이라도 적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한 한미동맹이었다.(konas)

 이주영(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