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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국가정체성 위기의 역사적·사상적 배경

Written by. 이주천   입력 : 2008-09-21 오전 5: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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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 민족과 단일의 언어를 보유한 한국의 경우, 일제 식민지라는 외세의 식민지 지배 경험을 겪으면서 민족의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사상적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첫 번째 위기는 식민지경험과 독립운동의 방책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세력으로 사상적으로 분열된 것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은 한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레닌은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그곳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양성을 언급하였는데, 이후제3세계의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것은 독립후 어떤 國體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에 연결되었으며, 갈등과 대립을 겪다가 중국의 국공합작에 영향을 받아 1942년 상해임정은 좌파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일찍이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의 본질과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좌우익 합작노선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미소 강대국의 한반도 주둔과 남북분단은 이념적 갈등을 격화시켰다. 여기에 신생국 대한민국의 건국 방향을 둘러싸고 독립운동가들간의 헤게모니 투쟁과 뒤섞여서 사상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사상적 위기다. 김구의 상해임정과 미주한인독립운동의 주역 이승만 계열은 건국을 두고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국제정세를 올바로 파악한 이승만이 신탁통치를 둘러싼 미소공위의 무력함을 질타하고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주의 국가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 소련 간의 전후 協力體制를 믿지 않았는데, 후일 이점에서 이승만의 통찰력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주목할 점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과 우익반공세력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을 위시한 남북협상파, 상해임정 등 중도와 좌익계열은 건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건국의 과정에서 해방꾼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해방이후 김구의 행적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할 점이 있다. 김구는 해방전 독립운동, 해방직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한 애국자이지만, 48년 5월 건국 직전부터 사사건건 이승만과 대립하면서 결국에는 김일성의 칙사이면서 북노당 총책이며 남파공작원 성시백의 꾐에 빠져서 평양 남북연석회담에 참석하여 빈손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김구는 이승만의 권력질주에 대한 개인적 질투심인지 아니면, 통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남한정부의 單政이 분단영구화로 간다는 점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하여간 잘못된 정치적 판단착오로 인해 5·10선거를 보이코트하여 건국을 방해한 인물로 역사적 기록에 남고 말았다.

 김구 일행은 평양에서 돌아와 4·30성명서를 발표했다. 4·30성명은 총 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4번째 조항을 보자.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 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선거로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김구와 남북협상파는 5·10 무효화 투쟁을 벌였고, 그들은 파리 유엔 총회에 호소하기 위해 대표단까지 구성하였다. 이시도는 김규식이 수석대표 자리를 거부함으로써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김구는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고 나서 새로이 선거를 해서 한반도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을 발표하고, 같은 내용의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그 이유는 김구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책략에 말려들었거나, 공산주의의 진정한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다.
1948년 5·10선거는 유엔이 보장한 합법적인 선거였고, 그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신생국 대한민국의 승인이 가결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확보했으며, 이와 반대로 북한당국은 유엔감시단의 출입을 거부해, 흑백선거를 치렀다. 결국 북한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한 불법국가가 된 것이다.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망한 독립운동가 안창호 역시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이승만과 줄곧 대립했으며, 사상적으로 좌우익합작을 반대하지 않는 일종의 容共主義者로서 남북협상파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이승만과 건국의 주역이 구상한 건국이념, 반공정신, 헌법정신, 그들이 지향한 가치관들은 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과 80년대말 전두환정권시절까지 비록 부분적으로는 인권의 침해가 있었지만 건국의 근본정신과 건국이념의 맥락이라는 차원에서 대체로 무난하게 계승·유지되어왔다. 이것이 바로 48년체제라고 할 수 있다.(konas)

 이주천(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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