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국가정체성에 대한 도전들 ①
87체제와 세계화의 위기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해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 미국의 발자취를 돌아 볼때,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이 대폭 증가하게 된 계기는 세 번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1929년 대공황 이후 등장한 루즈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뉴딜정책에서였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의 계획경제의 모델 일부를 채택하면서 행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파들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68년이후 미국사회가 反戰運動과 左傾化의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미국의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항했지만 향후 미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문화에 결국 흡수되고 말았다. 세 번째로는 2001년 9·11 테러사건일 것이다. 이는 세계화, 다문화주의, 범세계주의, 이민, 하부국가주의, 반국가주의 등으로 인해 약해진 미 국민들의 국가 의식을 자극한 사건이었다.
1. 87년 체제의 등장과 헌법 개정의 위험한 含意
한국의 경우, 앞에서 지적했듯이 독립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격돌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해방이후 統一問題와 國制에 대한 논의에서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상의 문제가 핵심적 사안으로서, 건국이후 반공주의에 투철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6·25동란으로 국론이 통일되고 그 이후 군부에서 박정희라는 강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하여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개방형 사회의 약점이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이를 好機로 한국사회의 左傾化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이는 바로 국가정체성의 위기로 치닫게 된다.
국가정체성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87년체제의 도전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이 도전은 80년대말 민주화의 열기속에서 나타난 87년 6월 항쟁이 그 분기점이 되었다. 80년 5월 광주의 유혈사태를 기회로 삼아 주사파를 중심으로 한 운동권세력들은 대학가에서 세를 불리면서 힘을 키워왔다. 군부의 5·18강경진압에 대해서 미국이 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해서 반미감정이 요원의 불길처럼 한국사회에 광범하게 퍼졌고, 급기야 반미운동권 세력은 대중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운동권세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인권유린이라는 허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공안당국을 무력화시키면서, 직선제 쟁취라는 구호를 걸고 서울의 중산층 넥타이부대를 끌어들여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추진하여 5공 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이로써 등장한 것이 바로 87년 체제이다.
1987년의 6·29선언에 뒤이어 10월에 이루어진 9차 헌법 개정과 함께 이른바 '87년 체제'가 나타나면서, 이승만의 '48년 체제'는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의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3·1운동 정신)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으나, 1987년의 제9차 개정 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의 토대가 "3·1운동 정신"으로부터 "임시정부"로 바뀐 것은 대한민국이 反共國家에서 左右合作國家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는 1942년부터 좌파들을 받아들인 결과 左右合作(좌우합작) 정부였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헌법을 추가적으로 손질하여 첨가하는 경우는 있어도 헌법정신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의 경우, 독립이후 왕당파는 토지가 몰수되었고 본국 영국으로 가거나 캐나다로 도주하여 왕당파는 청산되었다. 또 대영제국과 타협하여 자치정부를 구성하자는 협상파도 사라졌다.
신생국 미국은 건국초기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향하는 연방파(Federalists)와 주권론을 주장하는 反연방파(Anti-Federalists)라는 政派가 형성되어 세력다툼을 벌였다. 반연방파 지도자였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도 연방파들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지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인물로서 헌법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며 건국정신과 건국이념을 뒤흔들지 않았다. 그 이후 미국인들은 수정헌법이라고 하여 미진한 부문을 첨가하지만, 헌법정신이나 헌법전문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것은 건국세력(국부)간에 건국이념과 건국정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점은 중앙의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힘의 배분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차이였다. 제퍼슨은 보수파 인사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 갔다. 제퍼슨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도 모두 독립운동을 했거나 그런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정치적 後裔들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정체성의 위기는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여 루즈벨트 행정부가 뉴딜정책을 집행할 때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의 노동당 토니 블레어도 영국 헌법을 건드리지 않았다. 비록 국내 복지정책에서 보수당과는 차별을 두었지만, 외교정책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과거 보수당의 대외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 그래서 블레어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 지척에 김일성-김정일 공산집단과 항시 무력충돌의 위험성이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7년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 대한민국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용납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이것이 48년 건국이념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變革體制의 등장인 줄을 대부분의 순진한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영국의 국민소득을 추월하는 등 곧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장미빛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후 지난 20년간 한국사회는 노태우-김영삼 정권(민주화시대)에서 10년동안 '사회의 좌경화' 물결을 만들어내는데 대성공을 거두었고, 축구응원단도 '붉은 악마'로 명명하여 붉은 색에 대한 경계심이 완화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서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좌경화 시대)이라는 '권력의 좌경화'가 완성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90년대 초 부터 점차로 신원조회나 연좌제가 폐지되었고, 대학에서 교련이 없어지면서 캠퍼스는 좌경운동권의 아지트로 변질되었다. 87년초 박종철 고문사건과 90년대초 윤이병 학원프락치 사건을 철저히 좌익이 언론에 활용하면서 公安과 公權力이 일거에 무너졌으며, 국가보안법은 형해화(形骸化)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사상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의혹투성이의 주사파를 중심으로 한 좌파 운동권출신들이 좌익노조가 장악한 언론방송매체의 선전과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민주투사'나 '국민영웅'으로 등장하면서 구치소 수감 경력이 완장처럼 빛을 발하게 되었다. 한나라당과 여야 정당들은 이들을 사상검증도 생략한 채 경쟁적으로 영입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금뱃지를 목에 걸었다. 이들은 IMF환란사태를 활용하여 방송언론매체의 좌파들과 결탁하여 국민여론의 좌경화를 주도하면서 결국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을 탄생시킨 것이다.(konas)
이주천(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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