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미국의 ‘北韓 테러지원국 해제’
北의 ‘通美封南’ 에 미국이 협조하고 한국은 또 당했다.
미국 정부는 11일(미국시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북한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때문에 지난 1988년 1월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이후 20년 만에 족쇄에서 벗어났다. 테러국가로서의 반성과 실천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미국은 지난 8월 11일부터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할 수 있는 재량권을 확보했으나, 북한이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한’ 핵 검증 체계에 합의하지 않는다며 테러지원국 해제를 유보해 왔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결과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 같은 발표를 유보한 지 2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나섰다.
북한이 미국이 원하는대로 핵 이행 합의서에 검증에 응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북한은 핵개발을 다시 하겠다며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을 선언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또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은 어느 정도였는가. 북한의 막다른 단판시도에 미국의 일방적인 양보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부는 미국의 이번 조치가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야 한다.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최근 북한을 다녀오면서 북측으로부터 북핵 검증절차와 관련한 모종의 ‘역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와병설 속에 북측이 초청장을 내민 정황상 무엇인가 새로운 제의를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예상했던 결과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황에서 한국이 철저하게 소외되었는데 있다.
북측이 힐 차관보를 먼저 초청한 것이나 그동안 협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북한군 판문점대표부 대표(상장)를 비롯한 군부 인사들과의 접촉까지 허용한 것 등은 이례적인 것을 넘어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힐 차관보의 방북 시기와 맞물려 북측 제의로 먼저 열렸던 지난 2일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는 북측은 남측의 삐라(전단) 살포행위 중지와 책임자 처벌 등의 약속을 요구하며 재발시 개성공단사업 등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늘어놓고 실속 없는 회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북한은 미국과의 단판협상을 하면서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의 일환으로 남한과의 군사회담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바로 북한의 노골적인 ‘통미봉남’ 전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미국 역시 교착상태에 빠진 6자회담 복구를 위해 핵 검증을 영변 핵시설에 국한하되 미신고시설 방문은 추후 협의를 통해 검증하자는 내용의 ‘분리 검증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응한 북한의 역제의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한국을 배제한 '북미 고위급 군사회담'을 갖자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미국에 고위급 군사회담을 역제의한 것은 대선 정국의 와중에 레임덕까지 겪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불리한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북핵 문제와 테러지원국 해제, 북미관계 정상화 등 여러 현안에 있어 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또한 북한이 남한의 핵 사찰을 동시에 요구한 것도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북핵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통미봉남’의 희생물로 전략하고 말 것이다.
남북한은 이미 1991년 12월21일 남북 비핵화공동선언 문안 합의에 이어 이듬해 1월20일 선언의 서명을 통해 상호 핵사찰에 동의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사찰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주기적으로 핵물질에 대한 사찰을 받아온 만큼 IAEA의 사찰을 거부하며 핵 위기까지 몰고 갔던 북한과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북측의 동시사찰 주장은 결국 핵물질이 아닌 핵무기에 대한 검증단계에서나 검토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과 ‘김정일 건강 이상설’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정치공세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주요 과제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직접당사국인 한국이 배제되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부시 정부로서는 검증문제 타결 등 북핵문제를 진전시켜 어떻게든 대선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북측의 요구를 수용 했겠지만 미국의 이런 조바심을 역이용하려는 것이 바로 북한의 전략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어야 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두고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일리아나 로스 레티넌의원은 "북한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미국이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불법적인 핵프그램을 계속하고 극단적인 북한정권에 핵협력을 제공하는 일을 부추기고 말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를 보더라도 미국의 이번 조치는 성급하다 못해 북한에 역제의에 안달한 모양새를 나타낸 것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과거 북한이 위협을 가할 때마다 우리나라 좌파 정권이 퍼주기 대북지원을 해온 선례를 미국도 이제 따라 배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눈치만 살필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그런데 12일 외교부 발표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환영한다는 공식발표를 내 놓았다. 6자회담 참가국 중 북한 핵문제 해결에 가장 많은 예산과 물자를 지원해야 하는 국가는 바로 우리 한국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가 직접 당사자가 아닌 들러리로 만들려는 북한의 술책과 미국의 의도에 끌러가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직접 당사자인 한국을 철저히 배제하고 굳이 미국과의 직접회담을 통해 남한문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은 가까운 장래에 우리의 심장을 노리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앞으로 한국을 배제한 미.북간의 합의에 따른 대북에너지 지원이나, 경제원조, 식량지원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구 한말 강대국의 탁상논리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 전례의 암운(暗雲)이 또다시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는 것 같아 불안한 기운을 떨칠 수 없다.(konas)
권재찬(코나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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