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으로 미군방어 의지 알려
죽미령고개 전투 59년 기념행사에서 쿠허 소장 인터뷰
“한국은 그때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고 미군도 전쟁준비 없이 평화를 즐기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자 맥아더장군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스미스부대에 명령했습니다. 5백40명으로 구성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대를 최전방에 투입하여 미국이 대한민국을 도울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1일 열린 오산 죽미령고개의 제59주년 UN군 초전기념 및 스미스부대 전몰장병추도식에 유엔군 사령관을 대신해 추도사를 한 마이클 A. 쿠허 소장은 기념식에 앞서 만난 자리에서 스미스부대의 한국전 초전희생은 맥아더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 불가피한 선택을 결단과 용기로 받아드린 스미스부대원의 희생은 세계전쟁사상 기리 빛날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2차대전이 미군의 승리로 끝난 후 미국은 1천2백만에 이르던 군을 2백만으로 줄이고 UN체제를 통한 평화구조로 개편했다. 원자탄이라는 무서운 전쟁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원인도 있었다. 4개 사단을 예하에 두고 있으면서 일본 전후 통치를 하던 맥아더 사령부의 형편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정규사단 병력의 50~60% 정도의 무력만 유지한 채 병사들은 일본기생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이 소련제 T34 탱크 2백대와 잘 훈련된 20만 명의 공격군을 이끌고 남침했을 때 한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적인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인민군이 이렇게 거대한 전쟁준비를 해 소련고문단과 함께 38선을 침략할 줄은 몰랐다.
유엔이 이 엄청난 사태를 보고 인민군을 즉각 침략자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넘어가라는 결의안을 2번이나 채택했으나 인민군은 그해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완전히 공산화 한다는 방침 아래 줄기차게 남진공격을 했다. 여기에 단호한 저항을 보인 부대가 바로 스미스기동부대(Task Force Smith)였다. 맥아더는 유엔과 미군의 결의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기 위해 일본주둔군 중에서 가장 빨리 한국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부대를 편성하여 비행기와 기차로 오산전투지구에 투입했다.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대대장 찰스A. 스미스 중령)와 52야포대대(대대장 밀러 페리 중령)의 총병력 5백40명은 6월 30일 밤 비 내리는 일본 이타스케 공항을 떠나 부산에 내린 후 곧바로 열차로 평택까지 온 후 여기서 자동차 편으로 뒷날 유엔군 초전으로 기록된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고개까지 진출했다. 스미스부대장은 “가능한 최전방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과 맞서 이들을 저지하고 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스미스 부대는 훈련도 없고, 무기도 없고, 전쟁준비도 안된 채 투입되었어요. 맥아더의 의도는 명백하지만 이 명령을 감당할 부대는 거의 처음부터 희생이 강요된 것이었어요”라고 쿠어 장군은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중령은 부대배치에 앞서 스스로 짚차를 몰고 대전에서 죽미령 고개까지 두 번이나 시찰한 후 죽미령고개에 방어선을 칠 결심을 했고 300미터 후방에 포진한 52야포대대에게 최선의 방어를 할 것을 다짐했다. 죽미령고개는 멀리 수원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언덕이다. 적진 최근거리에 있는 이 언덕에 최선의 부대배치를 했다.
스미스부대는 7월 4일 비 내리는 밤을 통해 죽미령고개까지 진출하여 7월 5일 새벽 3시경 부대배치를 마치고 바로 이날 아침 8시부터 전투를 시작한다. 결과는 540명중 181명의 전사자를 내고 비참한 패배를 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의 평가에 따르면 이 전투는 침략군이 미군개입에 따른 전략재평가작업을 하는 동안 미군이 부산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게 했다. 엄청난 승리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쿠허 부사령관은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필요한 전쟁준비, 둘째 적절한 훈련, 셋째 적절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6.25당시 한국군도 미군도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아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취약한 환경 속에서도 일단 명령을 받았을 때 ‘정확한 판단력과 결심과 리더십을 발휘한’ 스미스 중령이야 말로 모든 미군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미스 중령은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측으로부터 많은 초청을 받았으나 단 한번 죽미령전투현장을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을 뿐이다. 너무 많은 부대원을 잃어 평생 이곳에 차마 눈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http://www.newsandnews.com/)
정일화(뉴스앤뉴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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