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미작가가 본 박세직 회장에 대한 회고
재미교포 주은택 씨, 자신의 블로그에 박 회장 별세에 대해 아타까움 전해.."형님! 이게 웬일입니까?"
박세직 형님! 영생복락 누리소서.
“형님! 이게 웬일입니까?”
오늘 새벽에 인터넷을 통하여 박세직 형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 6월24-25일 뉴욕에서 만났을 때, 대단히 건강해 보이고 뉴욕 재향군인회 주최 골프대회에도 참가해 건강을 자랑하셨는데 불과 1년이 지나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급성폐렴이 그렇게도 무서운 병일까? 요즈음 76세라면 돌아가실 때는 분명 아닌데, 더구나 한국이라는 나라가 좌경파들의 소요로 할 일이 많으신데 그렇게 급작스럽게 가시니, 누가 그 일을 맡아서 할지..
1952년 내가 8살 때였나 보다. 우리 집 바로 마즌편 윤치창씨 저택에는 왠 낮 선 사람들이 들어왔고, 곧 이어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의 전신]101헌병대 헌병(憲兵)일개 분대 병력이 진주(進駐)하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래지는 내게 아버지가 설명을 하셨다.
‘지금, 저 집에 들어온 민간인 복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케로 부대 요원들이란다..’ 그리고 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헌병대가 외곽경비와 보초(步哨)를 서러 이곳에 진주를 하게 된 것이고…’
헌병들은 몇 시간마다 교대로 얼굴이 바뀌었다. 그 때부터 몇 명의 헌병들이, 마주 보이는 우리 집엘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들에게 내 어머님이 가끔씩 김치를 비롯한 반찬류를 가져다 주었고, 그들은 내 어머니를 친 어머니처럼 따랐다.
그 중에 박세직 상등병(부산사범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입대-편집자 주)이 있었다.
‘아이고! ‘세직’이는 얼굴도 잘 생기고, 씩씩하고 방위(防衛)사 부대 안에서는 농구선수란다. 그리고 보초를 서지 않을 때는 늘 영어사전 러시아어 사전을 들여다 보고 다니지 않니? 그런데 왜 사병(士兵)을 하고 있는지 몰라, 훌륭한 장교감인데..’
우리 어머니는 틈이 날때마다 세직이 형 칭찬에 입이 마를 정도 였었다.
세직이 형은 얼마 후, 정규 육군사관 학교에 정규 2기생(12기)으로 입학을 했다. 4년 후 졸업식 때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태능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이민을 올 때 챙겨왔던 가로 세로 5센티 메터의 작고 낡은 그 사진의 뒷면에는 박세직형이 친필로 단기 4288년 2월. "어머님께 감사 또 감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그 사진의 소재를 모른다.
세직이 형은 장교 임관이 되어 재경(在京)부대(部隊)에 배속되고, 영외거주를 하기에는 마땅치가 않았던 터에, 마침 어머니가 그에게 당부를 했던 것으로 안다.
‘우리 택이가 말썽을 많이 부리고 공부도 잘 하지 않으니, 자네가 들어와서 좀 가르치지 않겠나?’
그로부터 나는 세직형에게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고, 같은 방을 약 1년 동안 쓰기도 했다.
1974년 가을이던가?..나는 조영남 이상해 박근형 박규채를 비롯한 가수와 탈랜트 50여 명과 새마을 운동 위문 공연을 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 마지막 공연을 1사단 에서 마무리했다.
1사단은 미국 군대가 진주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군에게 넘긴 부대여서 워커힐 하우스를 비롯하여 모든 시설물들이 매우 훌륭한 부대였다.
당시 나는 일행 중 나이가 비교적 어린 편인데도, 부단장 자격으로 참가했었다..왜냐하면 작가(作家)대접을 해 준 것이다.
미군이 사용하던 화려한 무대 공연이 끝나고 극장 밖에는 사단장을 비롯한 연대장급 대령들이 본인의 부인들과 함께 도열을 하고 있었다.
하나씩 인사를 주고 받으며 옆으로 가는데,
‘29연대장 박세직입니다’ 하는 게 아닌가?
“아! 형님! 저 은택입니다..가회동..”
“오! 오랜만이군..여보! 이 친구..저어 내가 평소 이야기 많이하던 그 가회동 있잖아..”
하면서 부인에게 소개를 했다.
“내가 지휘하는 부대가 DMZ를 관활하지..하루 밤 자고 갈래? 사습 노루도 많고 꿩도 많아”
정중하게 사양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그 다음해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이민을 떠나기 전에 형의 소재를 알아 보니,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떠나기 사흘 전 수경사령부에 전화를 했다.
“아! 참모장님은 청와대 안보담당 보좌관으로 영전하셨습니다”
1979 년, 10.26 사태에 이어 12/12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은 한국의 사태에 중심에 서있는 장군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선배들을 제치고 12기 생인 박세직 수도경비 사령관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도 했다.
특히 형님이 88올림픽 위원장을 하실 때는 뉴욕에 있는 나를 제외한 서울의 형제들은 올림픽 개폐막식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형님의 부인께서 옛날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해서 연희 누님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총무처장관을 비롯한 여러 관직과 서울시장, 안기부장, 88올림픽 위원장...까지 두루 섭렵을 한 형님은 한 세대를 풍미한 남자였으니, 조금 일찍 가셨지만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작년 뉴욕에 6.25 참전기념비 제막식 참석을 위하여 오셨을 때, 하루먼저 도착하신 형님은뉴욕재향군인회의 환영만찬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훌러싱 ‘아리수’ 식당에 오셨다.
나는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세직형 일행이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가 그를 반겼다.
“형님! 안녕하셨습니까?..저 은택입니다”
“…네에.. ??”
“저어 가회동 1번지 17호..기억나시죠?”
그래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았다..그 때 부인 홍여사가 나섰다.
“여보! 가회동 연희씨 동생..”
“아! 택이! 그렇지 택이지..”
그는 나를 상석으로 곁에 앉혔다..그 자리에 참석을 했던 백 여 명 중의 여러 노병(老兵)들이 물었다.
“박세직 장군님하고 뉴욕 ‘오발탄’[주은택이 다년간 방송했던 프로그램의 명칭]하고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일어섰다.
“형님은 초급장교 시절에 내 집으로 들어오셔서 한참 말썽께나 피우고 다니던 나를 가르치셨습니다..나는 형님이 대한민국의 재향군인 회장이라는 것에 대하여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이렇게 오랜만에 외국 땅에서 뵈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이어 일어난 형님도 답사를 했다.
노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다음 날, 열리는 골프대회에 형님과 같이 치려다가, 내가 중요한 약속이 있어 부득이 참석을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그러나 골프장에 가서 ‘형님 죄송합니다..제가 모시고 쳐야 하는데..훗날 또 기회가 있겠지요’했는데.
그것이 형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이야..
형님! 그러나 영생의 나라 하늘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상 받으시고 복락을 누리실 줄로 믿습니다..조국을 위해 일하신 빛나는 공적들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살아 남을 것입니다..편안히 가시옵소서..(Konas)
주은택 재미교포 작가 블로그 코요커(KOREAN-NEWYORK)에서 옮김
- 관련기사보기
-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