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할 ‘등가<等價>의 오류’
국회의원이 사용하는 폭력은 신성하고 조직폭력배가 사용하는 폭력은 저급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살고 있던 한 젊은이가 실존철학자였던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에겐 고민이 있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집안에 부양해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면 가뜩이나 병들고 늙은 어머니는 돌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로 결심하면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 실존적 딜레마의 실체였던 것이다.이 물음에 직면한 사르트르는 그 젊은이에게 말한다. “조국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고, 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네가 원하는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좋다.”
그 후 우리는 그 젊은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마음만은 편안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등가(等價)의 상황’이라고 한다. 이 ‘등가의 상황’에서는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엇비슷한 가치가 아닌데도 엇비슷한 가치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에는 ‘등가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즉 ‘등가의 오류’란 두 가지 대안이 경합하는 가운데 비슷한 범주의 가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엇비슷하다고 치부해 비교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노예제 존치를 주장하는 입장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의견이 맞선다고 할 경우, 양자를 엇비슷한 가치의 범주라고 평가해 협의과정에서 그 가운데를 택하거나 혹은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노예제 존치란 인권존중이라는 문명의 척도에서 봤을 때 야만에 해당하는 제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흔히 토론에서 두 가지 의견이 부딪친다고 할 때 양 의견을 같은 가치, 혹은 엇비슷한 가치를 지닌다고 상정해 그 ‘가운데’를 취하면서 ‘중용(中庸)의 지혜’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에서 이 ‘등가의 오류’를 범하는 전형적인 경우라면 폭력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폭력이란 그 자체로 나쁜 것이기에 누구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이 사용하는 폭력은 신성하고 조직폭력배가 사용하는 폭력은 저급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또 약자가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고, 범죄자가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도 소피스트의 주장일 뿐이다.
폭력행사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없는데도, 그것을 비폭력과 더불어 대안으로 놓고 그 가운데 아무거나 선택해도 좋다고 말한다면, ‘등가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유·인권·평등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반인권, 명령경제, 일인숭배 등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체제를 놓고 양쪽을 엇비슷한 가치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이념의 차이를 넘어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선과 선이 다툴 때는 ‘등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선과 악이 다툴 경우라면 ‘비등가의 상황’이기에 반드시 선은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한다. (http://kookbang.dema.mil.kr/)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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