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도 탄복한 대한국인 안중근
1910년 2월 14일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제6차 법정이 오전 10시에 열렸습니다. 재판장은 일본의 형법에 따라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그는 태연자약한 자세로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물어,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속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한 인간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담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종과 문종과 단종에 대한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성삼문의 가슴속에 흐르던 그 피가 안중근의 가슴에 뜨겁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사형을 언도 받고 오랏줄에 묶여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이 세상을 하직하며 남긴 시 한 수가 있어 <사세가>라 합니다.
북소리 덩덩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누엿누엿 서산에 넘어가는데
황천 가는 길에는 여인숙 하나도 없다고 하니
이 밤을 뉘 집에 묵어 갈 건가
그렇게 한마디 남기고 태연하게 떠난 “조선의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성삼문의 기백이 안중근에게 그대로 전해진 게 아니겠습니까.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안응칠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 신부가 찾아와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다웁게 하늘나라로 떠날 수 있도록 고해성사도 미사도 집례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여순감옥의 일본인 관리들도 함께 참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정근, 공근 두 아우님을 면회하고 20분 동안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는데 그 기도가 녹음되어 우리들에게 전해졌다면 한국이 오늘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의로운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못난 우리들에게 간곡한 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동포에게 고함>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1910년 3월 15일
안 의사는 3월 25일 동생들을 마지막 면회하고 유서 6통을 전하였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기 전 날, 고향에서 보내온 조선옷을 입고 형장으로 떠나기 전 약 10일 동안 안 의사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답니다. 그 광경을 그려보면서 내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대한국인 안중근을 생각하며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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