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참전 45주년을 맞이하며
"국가에 큰 기여한 유공자지만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1만1000여 명의 전우가 고통 받고 있다"
1964년 7월 제1 이동 외과병원이 베트남 붕따우에 첫발을 내디딘 데 이어 그 이듬해 주월 한국군사령부 창설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채명신 장군이 초대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임명받던 10월 12일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건군 이래 첫 해외파병인 베트남전에 참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를 비롯한 우리 참전용사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참전 45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국방일보 지면을 통해 그때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당시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에서는 1954년 10월 프랑스군의 마지막 부대가 하노이 작전권을 보응웬 지압 장군에게 넘겨주고 하이퐁을 떠났으며, 80여만 명의 베트남인은 프랑스군과 함께 남쪽으로 이주했다. 이들 대부분을 가톨릭계 지배층으로 이주 후에도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내부 분란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북베트남을 장악한 호찌민 정권은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한 후 이를 세력화해 임시정부 수준으로 진전시켰다.그리고 남북분단 이전의 남베트남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도 북으로 이주하지 않고 자기 지역 내에서 베트콩(VC)을 조직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공산화 통일이 되고, 한국도 6·25전쟁 후 불안정 상태이며,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공산화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되고 미측의 독자적인 전쟁 개입 명분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1964년 5월 9일 한국을 위시한 우방국의 참전을 유도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안보체제를 공고히 해 북의 위협에 대처하고 미국의 원조를 최대한으로 받아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려는 시기여서 베트남 파병은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좋은 조건이 형성됨에 따라서 1964년 9월 22일 제1 이동 외과병원이 붕따우에 주둔했고 1965년 3월 16일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이 1965년 10월 9일 청룡해병 1개 여단이 깜란에 상륙했다.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비행장에서 성대한 국민 환송대회 속에 수도사단이 맹호부대로 결단되면서 같은 해 11월에 베트남 중북 빈딘성 뀌년에 부대가 주둔하게 됐다.
그후 1966년 8월 27일 9사단이 백마부대 명칭으로 속속 파병해 종전 철수인 1973년 3월 23일까지 매년 평균 4만8000여 명이 주둔했고 연인원 약 32만 명, 전사자 5099명이 발생되는 희생도 있었으나 베트남 참전을 통해 파병부대의 장비 현대화와 국군의 장비개선, 한미 간의 유대강화 및 방위체제가 공고해졌고, 한국군의 전투 경험자가 축적됐다.
오늘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베트남참전자들은 국가에 큰 기여를 한 유공자지만 한편으로는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1만1000여 명의 전우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일부는 제대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으나 일부는 아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남긴 채 베트남 참전 45주년을 맞은 것이 오늘 참전 전우들의 아쉬움이나 노병으로서 참전의 큰 뜻을 되새겨 본다.◇
박민식 (사)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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