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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사나이 李厚洛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다.

Written by. 趙甲濟   입력 : 2009-10-31 오후 9: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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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厚洛 전 정보부장이 오늘 85세로 他界하였다. 박정희 정권下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앙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면서 10여년 간 權力의 핵심에 있었던 그는 김대중 납치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져갔다.
 
 1924년 경남 울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항공기 정비학교의 2년제 하사관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2학년 때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임관되지는 않았다. 1946년 國軍이 창설될 때 李씨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수개월의 短期교육 뒤 곧 소위로 임관됐다. 이때 익힌 영여실력도 그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의 군번은 79번으로서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고 朴正熙대통령(육사2기) 보다도 앞이었다.
 
  미 군정청이 운영한 이 학교의 입교조건은 일제시대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든지 장교급에 상응하는 경력을 가진 자라고 정해져 있었는데 李씨가 어떻게 입교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다. 李씨가 본격적으로 [정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때였다. 1951년 그는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임명됐다. 그때 정보국장은 김종평(金宗平)준장(전 서울신문 감사)이었다. 金씨에 따르면 李厚洛차장은 주로 HID업무, 즉 적정(敵情)탐지의 임무를 총괄했었다고 한다. {그때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게 金씨의 기억이다.
 
  李씨는 51∼52년 사이 미국의 병참학교 고등반에 유학, 최초의 미국 경험을 하게 된다. 52년 여름에 귀국하자마자 그는 육군병참감으로 천거됐다. 그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李鍾贊)중장. 당시 총장 비서실장이었던 안광호(安光鎬)씨(전 이태리 대사·무역진흥공사 사장. 예비역준장)에 따르면 李厚洛씨가 병참감으로 발령이 나기 직전 자신이 李총장에게 건의하여 인사기안내용이 뒤바뀌어 병참감에 이호(李澔)준장(전 내무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이 임명됐다고 한다. 서열상 李厚洛씨가 도저히 병참감이 될 수 없었는데도 그런 기안이 올라 와 安실장이 부당함을 진언했었고, 그 뒤로 李씨와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李씨가 병참감이 된 것은 2년 뒤였고, 그가 병참감에서 미국대사관 무관으로 옮겨 2년간의 미국생활을 체험한 뒤 귀국한 것은 1959년이었다.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李厚洛준장은 귀국 뒤 보직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렇게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 선뜻 그를 데려가려는 선배가 없었다.
 
  李준장은 日軍이나 만주군 인맥에도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독자적인 인맥도 형성하지 못했다. 전투병과도 아니라 군의 주류에선 벗어나 있었다. 李준장이 그때 가장 따랐던 이는 유재흥(劉載興)중장(전 국방장관)이었다. 劉중장은 李준장의 보직문제를, 당시 국방장관 김정렬(金貞烈)씨(전 국방장관·공군참모총장)에게 부탁했다. 金장관은 劉장군의 일본육사 선배일 뿐 아니라 양쪽 집안끼리도 아주 가까왔다.
 
  미 CIA가 정보계에 데뷔시켜
 
  金貞烈장관의 전임인 김용우(金用雨)국방장관 시절 한미 두 나라 국방장관 사이에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양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국 쪽에서 바라던 바였다. 李承晩정부는 해외정보, 특히 공산권 정보에 어두워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보기관은 육해공군에 설치된 방첩대(CIC)등이 전부였다. 이들 부대는 방첩 및 대(對)북한 관계 정보수집만 했고 해외에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59년 어느 날 미국CIA의 중요간부 한 사람이 金貞烈장관을 방문했다. 그 간부는 한국에 CIA지부를 설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부를 미 8군이나 미 대사관 같은 다른 미국기관과는 독립된 조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CIA요원들에게는 외교관에 대한 것과 꼭 같은 치외법권이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군이나 대사관을 아주 가볍게 보는 태도였다. 그때 李承晩대통령은 미국 정보기관을 대단히 싫어했다. 1952년 발췌 개헌 파동 때 미군정보기관이 李承晩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는 쿠데타 모의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철수를 미국측에 요구한 적도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金장관은 CIA서울 지부가 독립기관으로 주재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얻어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렇게 해서 미국 대사관의 고위간부 한 사람이 새로 부임하게 됐는데 그의 이름은 웨인 넬슨이었다. 미남인 넬슨은 물론 CIA 한국 지부장이었다. 넬슨은 부임하자마자 金장관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한미 국방장관끼리 맺어진 정보 교환 협정을 이행하려면 CIA의 상대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군 정보기관은 여러 갈래로 되어 있으므로 통합조정기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金장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3군에서 요원들을 뽑아 국방부 장관 직속 부대를 만들었다. 金장관이 그 부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李厚洛준장이었다. 부대 명칭은 중앙정보부. 대외적인 가명으로서 李준장은 [79부대]라 부르도록 했다. 자신의 군번을 딴 것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부대장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 점에서 李씨의 강한 [욕망]을 읽을 수 있겠다.
 
  이 [중앙정보부]란 이름은 5·16뒤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李厚洛씨가 이 부대의 책임자로 된것은 CIA의 추천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정보국 차장, 무관 경력에다가 영어를 잘하고 미국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李준장의 임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얘기다. 미국CIA와 관계를 트게 된 발단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깊은 관계가 된 뒤에는 양쪽이 아주 굳게 깍지를 끼게 된다. 이 부대에는 미국 CIA요원도 몇 명이 파견 나와서 초창기 업무를 도왔다.
 
  李承晩 특명, 라오스 밀행
 
  창설 당시 79부대의 인원은 20여 명이었다. 각 정보부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일과 CIA에서 넘겨주는 해외정보를 분류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CIA에서 건네주는 정보를 1주일만 모으면 캐비넷에 가득 찰 정도였다. 李준장은 CIA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간추려 매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고, 장관은 그 가운데서 더 중요한 것을 추려서 경무대에 보고했다. 國政 통수권자에게 정보보고가 체계적으로 되기 시작한 효시였다. CIA서울 지부와의 접촉창구로서 李厚洛준장이 그들의 마음에 쏙 들게끔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그 뒤의 관계로 미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초대 지부장 넬슨은 지부창립 직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용한 한국인 운전사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넬슨의 어린 아들이 운전사로부터 결핵에 전염돼 폐를 앓는 바람에 한국에 싫증을 느끼고 넬슨이 본국근무를 요망했다고 한다. 넬슨의 후임으로 2대 지부장에 취임한 데 실버씨는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왔다. 그는 슬라브족 출신이란 소문도 있었다. 실버씨는 李厚洛준장의 장래 후견인이 될 인물이었다. 실버씨는 부임할 때부터 정치공작 전문가란 악명을 갖고 왔다. 자유당 정부에선 그를 경계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실버씨는 한국에서 4·19, 5·16을 만났고, 그 뒤 월남에 현지책임자로 갔다.
 
  79부대장 李厚洛씨가 재임 중에 한 일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는 [라오스 미션]이다. 당시 라오스에선 파테트라오 군을 중심으로 한 공산계열이 우익 왕당파인 푸미 노사반의 정부군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李承晩대통령은 라오스가 적화되면 고딘디엠의 월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金국방장관을 불러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리가 도와 줄 일이 없을까}하고 의논한 끝에 李厚洛준장을 라오스로 밀파하기로 했다.
 
  당시 주 월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주선으로 李준장은 라오스로 가서 노사반 장군을 만나고 돌아왔다. 평양밀행(密行)이 李씨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무대였다면 라오스 밀행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 됐다. 서울로 돌아온 李厚洛준장을 데리고 金장관은 경무대로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다. 李준장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그는 {노, 노, 노사반 장군이…}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것이 李厚洛씨와 李대통령의 첫 만남이 됐다.
 
  李준장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白善燁)합참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버렸다.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李厚洛준장은 매주 두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과도정부 시대를 거쳐 민주당 정권 때까지 계속됐다.
 
  CIA 추천으로 정보실장 취임
 
  4·19 때 데 실버가 지휘하는 미국CIA 서울지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한때 무성했다. 4·19직전 CIA요원 1백50명이 오산을 거쳐 서울로 숨어 들어왔다느니, CIA가 학생들에게 돈을 뿌리며 시위를 충동질했다느니 하는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된 셈이지만 데 실버가 李대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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