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은 도처에서 非공산주의자들(지식인·지주·학생등)을 학살했다
북한 공산군과 좌익분자들의 만행
고양·파주 지역 학살
- 태극단원 학살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서는 교통부에 근무하던 이장복(당시 26세)이 수백 명의 태극단을 조직하여 적의 전화선 절단, 경의선 파괴 등 지하유격활동을 펼쳤다.
인민군이 퇴각하기 직전인 9월 20일 인민위원회와 내무서의 노동당원들이 지방 좌익 세력 30여 명을 앞세워 태극단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이태영(당시 29세)과 이두영(24)을 먼저 잡아갔다. 이후 태극단원 38명을 붙잡아 송포면(현 일산서구 송포동) 덕이리(현 일산서구 덕이동)으로 끌고 갔다. 좌익세력들은 조직부장 홍원식(당시 20세)과 간부 윤석만(당시 21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나서 창으로 찔렀으며 입을 찢어서 처참하게 살해했다. 또한 도주하던 이응만(당시 33세)을 붙잡아서 얼굴과 엉덩이의 살점을 도려내고 다리를 잘라 살해했다. 그리고 15∼16세 학생 등 38명을 모두 살해했다.
기독교인 학살
- 병촌교회 신도 학살
병촌성결교회는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에 있는 작은 교회다. 그 당시 신도는 모두 74명이었다. 마을을 점거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9월 27일에 반동분자라며 신도들을 구덩이 앞으로 끌고갔다. 정수일 집사는 당황하지 않고 공산당원들에게 '공산군은 패전하니 회개하고 구원 받으라'며 설득을 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은 쇠스랑, 삽, 몽둥이 등을 휘둘러 그녀의 시부모와 3명의 자녀, 시동생 가족 들을 때려 죽였다. 신도 66명(남 27명, 여39명)은 그렇게 참혹하게 맞아 죽었다.
- 임자진리교회 신도 학살
신안군 임자도에 초가로 지어진 임자진리교회가 있었다. 전쟁중에 이곳에도 남로당원들이 들어와 섬을 관리했다. 그런데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북으로가야 할 상황인데도 그들은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는 노동당원들의 감시 속에서도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있었다. 10월 5일 남로당원들은 두 가족을 포함해서 교인 48명을 백사장에서 칼과 죽창으로 살해했다.
- 두암교회 신도 학살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에 두암교회가 있었다. 두암교회에서는 평양 출신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그때 공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강연을 했다. 전쟁이 나자 공산주의자들이 두암마을로 들어와 교인들을 반동으로 몰았고 임동선 전도사가 공산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1950년 9월 하순경 퇴각하기 전에 김용은 전도사 동생인 김용채 집사와 우익인사들을 사살했다. 10월 19일에는 윤임례 집사와 그 자녀들을 붙잡아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죽였고, 교회와 신도들의 집 4채를 불태웠다. 또한 김용채, 조선환, 김용술과 그의 가족, 김용은, 박호준 등 23명을 칼로 찌르고 둔기로 때려죽였다. 그 뒤 교회와 집 4채를 불 지르고나서 사라졌다.
- 소록도교회 목사 등 학살
전남 고흥군의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하던 김정복(당시 61세)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고흥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9월 28일 우익 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되었다.
- 법성포교회 목사 등 학살
전남 법성포교회 김종인(당시51세) 목사는 9월 29일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살해당했고 그의 가족 4명과 교인 24명도 죽임을 당했다.
- 만경교회 목사 등 학살
전북 만경교회 김종한(당시 45세) 목사는 교인 15명과 함께 김제내무서 우물에 생매장되었다.
- 연동교회 목사 등 학살
목포 연동교회 최명길(당시 44세) 목사는 목포 건너편 작은 섬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인 20명과 배를 기다리다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심한 매를 맞고 숨졌다.
진실화해위에서 밝혀 낸 학살
2008년도에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학살사건 규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김제지역 학살
전 현직 군인, 대동청년단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 등 우익인사와 부유층 지주, 그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7월 28일 김갑동을 비롯하여 12명, 8월 2일 최준식을 포함한 4명, 8월 26일 봉남면 신응리 종정장터에서 8명, 9월 27일 김제내무서 앞 야산 공터에서 김기철 등 62명, 만경면분주소 우물과 방공호에서 만경교회 교인 15명을 비롯해서 53명, 소토리 공동묘지와 화포리 창자마을에서 65명 등등 지방 좌익과 내무서원들에 의해서 모두 2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서천지역 학살
1950년 9월 중순경 분주소와 내무서에서 조사를 받은 우익인사들이 풀려났다. 그러나 9월 25일경 다시 잡혀가서 12평짜리 서천등기소 창고에 240∼250명이 감금되었다. 9월 27일 01시경 좌익 세력들이 창고에 불을 질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 학살은 북한 노동당 지시를 받아 자행되었다. 우익인사들은 군경의 가족, 대한청년단 등이었다. 학살은 노동당위원회에서 결정했고 정치보위부에서 집행했는데 서천군의 노동당위원장, 인민위원장, 정치보위부장, 정치보위부원 7명, 내무서장, 내무서부서장, 노동당 세포위원 등등이 관여했다. 나중에 이들 대부분은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예산지역 학살
1950년 9월 9일 우체국 집배원 이종성, 상궁리 이장 이춘성, 고흥억 등이 지방좌익에게 끌려가서 고덕면 대천링서 희생당했고, 예산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고영준을 비롯해서 12명은 1950년 9월 25일과 9월 27일 사이에 향천리 공동묘지로 끌려가서 살해됐으며, 삽교면 삽교분주소 앞 양조장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12명이 삽교면 두리 공동묘지와 신가리 야산(일명 꽃산)에서 피살됐다.
이후 36명이 신가리 야산에서 죽었다. 신암면 예림리 사람들이 수복된 줄 알고 좌익 세력들을 폭행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암분주소와 지방 좌익들이 서용길, 유분석, 강한구, 황도연외 2명을 체포하여 종경리 야산으로 끌고가 살해했고 대술면 산정리 신작로 소나무 아래에서 15명을 학살했다.
금산지역 학살
1950년 7월부터 11월까지 지역 자위대와 인민군 등이 이장과 면장, 공무원과 그 가족 등 118명을 살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들의 가족관계등록부의 사망 일시를 정정하고 각종 기관 자료에 당시의 지역사를 바르게 기술할 것을 권고했다.
청원지역 학살
1949년 10월∼1950년 10월 동안 빨치산과 지방 좌익, 내무서원, 인민군 등에 의해 문헌자료와 참고인 진술을 통해 33명의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인민위원회에 협조하지 않고 군경에 협조하였거나, 공무원을 지내고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하여 학살했다.
부여지역 학살
1950년 9월 12일 윤대선을 비롯하여 3명이 인민재판을 받고 홍산면분주소에서 희생되었고, 구룡면 용당링서 4명 등 총 11명이 피살되었다. 피해자(면장, 기자, 의사, 교장)들은 지식인이자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 활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학살 기록은 북한의 노획문서인 '부여군 검찰소 문서'에 나타나 있었는데 정치보위부와 내무서, 그리고 인민군이 협조하여 공조한 흔적이 엿보였다.
청주지역 학살
인민군이 청주로 들어온 이후 노동당원들은 청주형무소, 청주내무서, 정치보위부 등 3곳에 우익인사를 붙잡아다 감금했다. 이후 인민군이 퇴각할 즈음인 1950년 9월 24일∼25일 이틀 동안 일시에 3곳에서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청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형무소와 당산(동공원)에서 234명 이상이 사살되거나 둔기로 타살되었고, 청주내무서에서는 120명을 무심천으로 끌고가 총살했다.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던 우익인사 95명은 좌익 세력들이 산성리 토굴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청주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정치보위부 명령에 의해 인민군, 내무서원, 빨치산이 학살을 집행했다.
가평지역 학살
1950년 9월 말경 가평면 마장리 노루목고개에서 농민 200여 명이 인민군과 내무서원에게 학살당했다.
강화지역 학살
1950년 9월 29일 밤에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에서 고상곽 외 48명이 인민군과 내무서원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 외 김주현 등 18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해자 주체는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 좌익 등으로 확인되었다. 희생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있었거나 벽보와 삐라를 만들어 배포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피살당했다.
주문진지역 학살
1950년 7월 10일 교항리에서 대한청년단 100여 명이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평남 양덕군 반공인사 학살
필자는 고향인 평안남도 양덕군 대륜면에서 좌익의 무자비하고 포악한 만행을 체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책을 펼쳐 부친이 평생 동안 고생해서 모은 전답을 몰수했다.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백서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반동이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했던 것이다.
필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고향에서 유격대생활을 했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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