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의 한반도 정책에 둘러 쌓인 의혹들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 척 한 위선적인 친북정치가
I
70년대 유신체제의 시절에 대학생들의 데모는 일상적인 캠퍼스의 모습이었다.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한미간의 밀월관계도 끝났고, 한미관계는 살얼음판을 딛고 있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는 미군철수 소문이 퍼져서 불안감에 쌓였고, 미국내에서는 미의회의 의원들에게 불법적으로 뇌물을 준 혐의로 검찰조사에 들어간 ‘박동선게이트’와 전직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에 망명하여 한국정부의 기밀정보를 터트리는 청문회가 열려서 미 언론은 연일 한국문제를 부정적으로 보도하기에 무척 바빳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TV를 시청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은 기억이 있다. 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간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이 방한했다. 그가 국회에서 연설했을 때,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카터는 연설 도중에 “Human Right, Democracy in South Korea”를 연달아 반복하여 외쳐대었다. 그럴 때마다 야당의원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박정희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그리고 석달이 몇 주 지난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이던 부하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70년대의 한미관계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I
대통령후보시절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카터는 원래 워싱턴 정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교회의 성경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카터는 독실한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70년후반기 미국사회는 베트남전의 패배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크게 실망하고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으로 정치지도력의 도덕성 상실을 목도하면서 미국사회는 계층간, 정파간, 세대간에 크게 대립·분열되었다. 카터는 조오지아 주지사를 역임하면서 이런 민심이반의 사회적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햇다. 그래서 대외정책에서 ‘Human Right"를 선거아젠다로 설정하여 캠페인을 벌린 결과 포드 현직 공화당 대통령을 미세한 차로 이겼다.
그 당시 박정희 유신정부는 워싱턴 정계의 이방인인 카터가 당선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으며, 만약 당선되더라도 주한미군철수를 일종의 레토릭으로 간주하여 심각하게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가 현실로 나타났다. 마치 노무현후보가 이회창후보를 역전시킨 꼴이 된 것이다. 카터는 미국민들의 예상을 깨고 당선되었고,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자신의 공약을 실천에 옮기려고 서둘렀다.
도덕적인 인권정치가의 타이틀을 가진 카터는 대통령시절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퇴임후 세계분쟁지역을 돌면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카터는 오늘날 한국언론을 통해서 한국민에게는 퇴임후 세계평화를 노력하여 노벨평화상으로 수상한 인물로 널리 홍보되어 있다. 그 이면에는 카터야말로 미국 역대 대통령중에서 가장 親北的인 성향을 보인 인물이란 점이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카터는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미워했다. 왜, 어떻게 해서 카터는 친북 대통령으로 형성되어갔나?
III
첫 번째 의혹은 카터가 박정희를 미워했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이다. 70년대 중반기 미국내의 反韓(반한) 분위기속에서 카터는 박정희에 대한 혐오감을 키워나갔다. 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이후 미 진보언론은 인권을 강조하는 민주당 프레이저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 하원의원들의 청문회를 열어서 박동선게이트와 김형욱망명사건을 추궁했으며 미 진보언론들은 이를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정치의 부정적인 면을 경쟁적으로 들추어내었다. 60년대 베트남에서 용전분투한 한국군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한국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공식적인 세 가지 이유로서는 ➀ 박정희정부의 유신체제가 김대중, 김영삼과 지학순 등 미국에서는 ‘민주투사’와 종교지도자로 인정받는 인물들을 박해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했고, ➁ 알프레드 마헌(Alfred T. Mahan)과 같은 해군전략가의 교리에 따라서 미지상군이 아시아 본토의 전방기지에 묶어 두는 것은 미국이 전쟁개입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피해야한다는 논리를 신봉했으며. ➂ 핵 공학도였던 카터는 미국이 수백대의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한 것에 경악했다는 점이다.
비공식적으로 카터가 박정희를 혐오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더 첨가된다. ➀ 박정희는 미국이 반대한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것이다. 원래 한국은 60년대에 가발, 장난감, 의류 등 경공업 제품을 싸구려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였다. 60년대말에 오면서 이런 방식의 대미덤핑수출이 벽에 부딪쳤고, 그 타개책으로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가들 모두가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여기에 ➁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건 박정희가 추진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의혹이 말끔히 가셔진 것은 아니었다. 이 여섯 가지 이유에서만도 박정희는 포도행정부시절부터 카터 행정부시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고위층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힌 말썽꾸러기 인물로 각인되었다. 미국에게는, 박정희는 아시아판 사담 후세인이었던 것이다.
IV
두 번째 의혹은 카터가 주창한 주한미군철수의 동기는 철저히 보안과 비밀에 쌓여있다는 점이다. 누가 철수를 조언했으며, 언제, 어떻게 해서 주한미군 철수정책이 추진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카터의 브레인 역할을 한 안보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와 밴스 국무장관도 철수정책의 입안에 대해서는 모른다. 카터도 자서전 Keeping Faith에서도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카터와 같이 백악관으로 갔던 조지아 마피아사단의 팀플레이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상의없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고 강행했다는 점이다.
카터가 조오지아 주지사로서 대권의 야망을 품고 있을 시절인, 74년말에 주한미군철수와 미북관계 개선의 이론적 틀이 구체화되는 글이 나타난다. 72년 워싱턴포스트지 기자로 5월말에서 6월말까지 한달간 북한을 방문했던 해리슨(Selig Harrison)이 계간지 Foreign Policy에 기고한 글에서 그 구체적 이론이 나타났다. 74-75년 겨울호에 실린 그의 논문 “One Korea”에서는 북한의 脫中蘇 자주노선과 한반도에서 미일중소가 배제된 脫强大國 관계를 제안하여 다분히 북한에 동적적인 논조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해리슨의 논리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주번 강대국의 긴장을 항상 고조될 수 밖에 없으므로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만이 미국이 오히려 태평양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터가 해리슨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국무부 태평양아시아담당 차관보로 영전한 홀브루크(Richard Holbrook)는 Foreign Policy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 해리슨의 논문을 재개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혹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된다.
IV
세 번째 의혹은 과연 카터는 자신이 주창한 인권외교를 전세계에 공정하게 보편적으로 적용했던가에 있다. 70년대에 미국이 주목하는 많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점이 지적되는 나라가 있었다.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북한, 쿠바,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 심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카터가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위협을 가할 때, 북한 김일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진전되었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미국과 북한은 서로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카터후보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들고 나왔을 때, 신바람이 나서 대환영(Great Welcome!)을 하면서 對美接近을 서둔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다. 이미 김일성은 1973년에 미 의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한반도로부터 미군과 핵무기를 철수하기 위한 직접 협상을 제의했었다. 76년 11월, 카터가 당선된 직후 김일성은 알리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직접 접촉을 원하는 친서를 조오지아의 플래인스(Plains)에 머물던 카터에게 보냈다. 다음 해, 2월에는 북한 외무장관 허담이 파키스탄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국무장관 밴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구할 것이며 한국을 배제한 채 미북간 직접 협상을 원하며 미국과의 대결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카터는 한국정부의 사전협의 없이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북한과 협의할 수 없으며 도리어 북한이 남북대화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의 조총련 간부인 李季白은 미국특파원들을 만찬에 초청하고서는 카터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한껏 추켜세우며 지금이야말로 미북한 관계를 정상화할 시기라고 주장했다(The New York Times, 1077.3.18).
그러나 미국사회는 북한의 호전성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68년 판문점근처에서 미루나무를 베는 미군병사가 북한군 도끼에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고, 원산만에서는 해군정보함 푸에블로가 납북되는 사건이 있었다. 74년에는 비무방지대에서 발견된 북한의 땅굴문제도 미 언론에서 보도되었다. 75년 4월에는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 이때를 즈음해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북한이 과거 수년간 일본, 중동, 유럽 등지에서 오는 수천명의 게릴라와 국제테러리스트 해방주의자들의 훈련 및 집단장소가 되어왔다고 비난했다(동아일보, 1977.3.16). 북한의 호전성을 미국인들이 잊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 행정부는 77년 3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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