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21세기 한국의 대미 정책 방향

제 1회 고등학생 대학생 연합 학술 컨퍼런스 - 한·미관계사와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Written by. 한 울   입력 : 2010-02-15 오후 10:09:49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0

*국제외교안보포럼 주관 '제1회 고교생.대학생 연합 학술 컨퍼런스' 고교생 우수 논문임. <편집자 주>

1. 서론

주제를 맨 처음 제시받았을 때, 정말로 많은 생각과 주제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제시하게 된 주제는 미국이었다. 주제에서 다루는 한국의 외교, 안보, 대북 모두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국가는 바로 미국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미국을 지속적인 동맹파트너로 보는가, 언젠가는 제휴하지 않을, 자주성을 훼손하는 패권국으로 파악할 것인가의 그 쟁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평소에 청소년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 북한과 중국, 일본, 나아가 동북아 국제정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미국은 분명 청소년들에게도 흥미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 보기로 하였다. 단순한 한미관계로 포괄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좀 더 깊은 탐구를 하기 위해, 미국과의 외교가 끊임없이 논의되는 쟁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주한미군과 작전권통제 부분이었다. 실질적으로 한미관계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실행되는 부분이라는 점, 또한 그만큼 첨예한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 앞으로도 한미관계를 위해서 많은 논의와 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한미군의 작전권 통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반세기 동안 한·미 동맹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주한미군의 규모,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지원 규모,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반환, 한·미 행정협정상의 불평등한 조항의 개정, 한국의 방위비 분담 규모 등 많은 점에서 한국과 미국은 갈등과 조정을 거듭하면서 군사동맹관계를 유지시켜왔다. 이러한 사례들을 얼핏 알아보게 된다면, 미국에 대한 분함의 감정을 자아내게 된다. 뿐만 아니다. 미국이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비판받을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미국의 태도, 국제평화주의(국제 사회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국제법 질서를 존중하는 것)를 무시하면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분명 잘못되었고,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국제정치는 철저한 “현실파악”과 “국가의 이익”을 기반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제정치에서는 철저한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그 속에서 한국이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자국의 이익인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주한미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작전권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현실적인 고찰이 있은 후에야, 그에 안주하지 말고 보다 더 긍정적인 방향을 도모해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국가의 이익을 도출하는 목적으로 한미관계가 정립되고 주한미군이 주둔되었는지 먼저 그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후에는 탈냉전시기를 중심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를 짚어보고자 한다. 나아가 변화된 한미관계와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며, 현재 21세기의 주요 상황과 정세,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의 변동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의 한국주둔과 작전권이 가지는 가치와 앞으로 한국의 과제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Ⅱ. 주한미군의 성립과 목적

한미관계가 정식으로 성립하고, 한국에 주둔하게 된 목적과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해방 직후의 상황과 한미관계를 제시하고, 그 상황과 관계로부터 주둔하기 시작한 주한미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초기의 한미관계는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던 개화기 때였기 때문에 이때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지금의 한미관계를 재단하고자 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국 역시 태평양전쟁 시기까지는 한반도는 원거리 무관심 지대에 지나지 않았다. 즉 한국에 대한 명확한 지정학적 입장을 정리하지도 못했고, 확고한 전략적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화기 때와 태평양전쟁 때의 한미관계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해방 전후로부터의 한미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주한미군의 주둔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1) 해방직후의 한미관계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식민지 수탈로 인해 피폐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정이 개입하여 한국군 창설 및 한국정부 수립을 지원하게 된다. 다만 38선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한반도 분할은 군사적 차원에서의 ‘행정적 편의’ 에 입각한 임시적 조치에 불과하였다. 또한 미국의 대소정책과 전략은 아시아를 경시하고 유럽을 중시하는 소위 유럽우선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Acheson line에 따르면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켰으며, 제외된 방위선 이외의 지역의 군사적 안보에 대해서는 이 지역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며, 또한 그러한 보장을 실제적 면에서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해둔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불개입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즉 한반도의 이중적인 주변성과, 미국의 전략과 극동전략에 있어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미국은 당시만 해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미국의 이러한 인식은 바뀌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북한군은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였다. 한국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북한군은 불과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하였다. 그 이후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3년 10개월 만에 종전도 아닌 휴전협정으로 마무리가 된 것이다.

바로 이 6.25 때부터 한국과 미국은 비로소 공통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은 북한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주권을 유지하는 것, 미국은 북한을 저지함으로써 자국의 영향력을 아시아에서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즉 북한의 침략을 소련 공산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간주한 미국은 6·25 전쟁을 방치할 경우 한반도와 가까운 자국 점령 하의 일본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 아시아 전체에 대한 영향력 자체를 잃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목적은 다르지만 북한을 저지하겠다는 움직임이 확실하게 한·미 양국에게 설정되자 미국은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실행하였다.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은 UN군의 일원으로 총 5백 72만여 명을 파병하였는데, 이는 전체 UN군의 50% 해군은 85.9% 공군은 93.4%를 차지하는 등 한국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참전 미군은 전사자 36,940명을 비롯한 부상자 92.134명을 비롯한 실종 및 포로 8,1748명의 희생을 치루었음을 통해서 미국의 적극적 지원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 역시 미국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며 1950년 7월 14일에 중대한 사실을 결정하게 된다. 바로 한국군 전체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현재의 적대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이라는 전제 아래 UN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의 제의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정일권의 건의로 이루어진 것인데, 한국군의 병력이 3만 2천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서 UN군과의 통합작전 능률을 극대화시켜 전쟁수행에 기여하고, 한국군에 대한 지원책임을 미국으로부터 명확히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은 전쟁기간 동안 무려 3~4억 달러에 달하는 직접 군수물자 원조를 받았고, 덕분에 전면전을 수행 중인 국가로서는 매우 적은 GDP3~7% 수준의 자체비용만으로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은 한국전쟁에 많은 수의 군대를 파견시켜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해 주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국 역시 그에 대해서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며 6·25 전쟁을 미국과 함께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은 종결되지 못하였고, 휴전으로만 마무리되게 되었다. 완전한 종결도 아닌 상태를 위하여 지나치게 미국에게 협조적인 움직임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비자주성이라고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즉 대미관계를 자발적 노예주의와 그 예속성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적하는 것의 근거는 바로 한미 동맹의 비대칭성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한국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주는 국가였다는 점에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 이후 한국과 미국은 1953년 상호방위조약을 통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켜 한국전쟁의 재발을 막는 한편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을 지탱해왔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이러한 원조의 결과로 미국의 한국의 국내정치에 대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한미관계는 비대칭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비대칭적이었지만, 그 실행과정에 있어서는 한국에게 선택권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오히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카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