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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博 정부 2년 - 대북정책 평가

1998년 김대중 정권 등장 이래 망실(亡失)되어 버린 통일정책을 복구해야

Written by. 李東馥   입력 : 2010-03-02 오후 4: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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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5년 임기 가운데 2년을 보내고 3년차에 진입하고 있다. 국정 전반에 걸쳐 중간평가와 점검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그 가운데 대북정책 분야를 평가해 보는 것이다. 2008년2월25일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 초기의 대북정책은 2007년12월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 준 ‘보수.우파’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불안감과 실망감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대선 승자(勝者) 이명박 후보와 패자(敗者) 정동영(鄭東泳) 후보 사이의 표차 530만 표에는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미 안보동맹의 부실화, 남한 사회의 좌경화에 의한 국가정체성의 훼손 그리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대북 ‘퍼주기’ 시비를 불어 일으킨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고 국정(國政)의 우선회(右旋回)를 단행하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그 같은 표심의 요구를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대선 후보 시절은 물론, 2008년2월25일 취임 이후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실제로 추진한 대북정책이 내용 면에서는 이 같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드러난 표심(票心)의 요구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같은 사실은 이명박 후보가 대선 후보의 입장에서 선거공약으로 제시했고 사실상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공식화되어 있는 ‘비핵.개방.3000 구상(構想)’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구상’의 내용은 북한이 ‘비핵’과 ‘개방’을 수용하기만 하면, 국제사회와 함께, ① 3백만 달러 이상 수출기업 100개 육성, ② 30만면의 산업인력 양성, ③ 4백억 달러 상당의 국제협력 자금 조성, ④ 새 경-의(京-義) 고속도로 등 산업 인프라 구축 및 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 경협 패키지의 추진을 지원하여 “10년 내에 북한 경제를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 수준의 경제로 끌어 올려 주겠다”는 것이다.

이 ‘구상’에 대해서는, 특히 제시하고 있는 파격적인 대북지원 내용을 문제시한 ‘보수’ 세력으로부터,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비에 대해서는 이 후보 자신이 대선 투표일을 한 달 남짓 남겨 둔 그 해 11월8일 재향군인회 초청 연설의 기회를 빌어서 자신의 구상이 이전 정권들의 ‘햇볕정책’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가 강조한 것은 ‘햇볕정책’이 “주어서 변화시킨다”는 것이었던 반면 그의 구상은 ‘변화해야 준다“는 확실한 ’조건부‘ 제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비핵‘과 ’개방‘을 ’3000‘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는 “북한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없는 남북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고 “개혁ㆍ개방을 거부하는 한 (남북경협의) 열매는 없다”고 못을 박았었다. 그는 뿐만 아니라 “19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한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한 군사적 신뢰구축을 대북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정부는, 집권하면, 남북간의 기존 합의 가운데서 김대중 정권 때의 ‘6.15 남북공동선언’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노태우(盧泰愚) 정권 때의 ‘남북기본합의서’에 입각한 남북대화만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2008년2월25일 그의 정부의 공식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이명박 ‘당선인’이 직면하고 있던 대북정책의 또 다른 현안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노무현 정권이 이른바 ‘10.4 남북정상선언’과 ‘11.16 남북총리회담 합의서’를 통하여 북한측에게 방만하게 약속한 대북 경협 프로젝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 ‘당선인’은 2008년2월1일 <동아일보>.<아사히신문>.<월스트리트저널> 등 3개 신문 공동회견을 통해 명쾌한 해법을 내놓았다. 이들 대북 경협 프로젝트들을 ① 북핵 문제 해결, ② 경제적 타당성, ③ 재정부담 능력 및 ④ 국민적 합의 등 ‘4개 기준’에 입각하여 ‘재검토’하고 그 결과에 따라 ① 당장 이행할 것, ② 추후 이행할 것 및 ③ 이행하지 않을 것 등 세 가지로 분류하여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새 정부의 대북정책의 내용이 이만큼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범 이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혼선에 휘말렸던 원인은 이명박 정부 스스로가 제공한 것이었다. 우선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과제의 우선순위 배정에서 비롯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국정의 최우선순위를 ‘경제’에 배정하는 ‘경제 제1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대북정책은 국정과제 우선순위에서 후순위(後順位)로 밀려 났다. 그 결과,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의 표심(票心)에 담겨 있던 대북정책 영역에서 ‘좌파 인맥’을 과감하게 물갈이하라는 ‘인적(人的) 청산’ 요구는 묵살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전수석으로 그의 평양방문을 수행했고 ‘햇볕정책’의 ‘전도사(傳道師)’의 한 사람이었던 인사가 통일부장관으로,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법무장관이었던 인사가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는 등 인사의 파행(跛行)이 연출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집착했던 ‘경제 제1주의’는 예상치 못했던 파국(破局)을 자초했다. 성급하고도 경솔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가” 결정은 엉뚱한 ‘광우병(狂牛病) 소동’을 촉발하여 전국 규모의 ‘촛불 시위’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의 몰패(沒敗)로 한껏 위축되었던 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세력에게 정권 재탈환에 의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릴 수 있는 위치로 부활(復活)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2007년 대선에서 그에게 표를 던졌던 ‘보수.우파’ 성향의 유권자들 가운데서는 상당수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을 다루는 과정에서 보여 준 이념적 정향성(定向性)에 대한 불안감과 배신감(背信感) 때문에 2008년 총선 때 이미 <한나라당>에게 등을 돌렸었다. 이 같은 ‘보수’우파‘ 세력의 이탈 현상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가”를 둘러 싼 ’촛불 시위‘ 과정에서 더욱 증폭되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이에 놀란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처방인 ‘중도강화(中道强化)’론은 오히려 지지세력 이탈현상을 가속화시켰다. “타는 불에 기름 끼얹기”가 된 것이다.

2008년7월11일 발생한 금강산에서 북한군의 사격으로 남측 여성 관광객이 사망한 사건이 이명박 정부에게 상황 반전(反轉)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보다 단호한 입장으로 북한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명박 정부 안에서의 진통은 계속되었다. 정부 안에 잔류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논자’들의 저항과 사보타지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김대중 정권의 ‘6.15 선언’과 노무현 정권의 ‘10.4 선언’의 명맥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이 두 ‘선언’을 배척하고 노태우 정권 때의 ‘남북기본합의서’에 바탕을 둔 남북대화를 추진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를 ‘물타기’하고 희석(稀釋)시키는 데 급급했다. 2008년6월 김하중(金夏中) 통일부장관(당시)이 이명박 대통령의 금지를 무릅쓰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주빈(主賓)으로 하는 ‘6.15 선언 발표 8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은 그 하나의 사례였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드디어 단안을 내렸다. 이 대통령은 2009년2월의 개각을 통해 통일부의 수장(首長)으로 현인택(玄仁澤) 장관을 기용하는 한편 국가정보원장의 책임자를 원세훈(元世勳) 원장으로 경질했다. 그리고 나서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남북관계의 일시적 후퇴는 필연적이었다. 북한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금강산 관광의 중지가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북한대로 한-미 양국을 상대로 하는 ‘벼랑 끝’ 몽니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남한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요구로 개성공단 운영의 파행(爬行)을 강요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군사도발을 위협하며 남북간의 기존 합의들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미국에 대해서도 북한의 몽니는 한 동안 격화되었다. 북한은 그 동안 어렵게 진행 중이던 ‘6자회담’ 프로세스에 급제동을 걸어 탈선(脫線)을 강요했다. 영변지역 핵시설 ‘불능화’ 작업의 중단과 ‘원상 복귀’에 이어 핵무기 개발 재개와 베이징 ‘6자회담’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해가 바뀌어 2009년1월 미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가 물러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민주당 행정부가 등장하자 북한은 미국에 대한 도발 행위를 더욱 격화시켰다. 장거리 대륙간 탄도탄의 세 번째 시험발사(2009.4.5)와 두 번째 지하 핵실험(2009.5.25)을 강행한 것이다.

이 같은 북한의 몽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단호하고 의연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격화되는 도발 행위에 대해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두 번째의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은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하여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내용의 1874호 결의를 유엔안보리에서 만장일치로 통과(2009.6.12)시키고 이의 철저한 이행을 다그치는 것으로 대응했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도 북한의 두 번째 지하 핵실험 실시 다음 날인 5월26일자로 그 동안 오래 미루어 오던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체제) 전면 가입을 단행함으로써 이 같은 국제공조에 적극 동참했다.

심화되는 국제적 고립 속의 북한은 대내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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