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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나의 가족의 처참한 비극

Written by. 이용만   입력 : 2010-03-11 오후 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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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오는 신입생들 상당수가 6·25전쟁은「북침」으로 발발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자녀들에게 역사를 잘못 가르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어쩌면 사선을 넘어 최근 북한을 탈출해 온 사람들이 북한에서 배우고 들은 내용과 그렇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치밀한 남침준비 현장에 동원되었었다

 탈북자들에게 나의 체험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당신들은 6·25전쟁을「국방군인들이 쳐올라와서 용영무쌍한 조선인민군의 정의의 반격으로 남반부를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요?" 교육때마다 물어보면 모두「그렇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들이 어떻게 탈북자들과 인식이 같게 되었을까? 천지가 놀랄 일이므로 뒤늦게나마 나의 체험을 통해서 증언하고자 한다.

 강원도 북한 중부전선의 남단에 위치한 平康 고급중학교 학생때의 일이다.

 - 수업은 전폐하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탱크와 군용차량이 화차에서 바로 내릴 수 있도록 평강역의 플랫폼을 높이 쌓아 철로 수준까지 올리도록 들 것으로 흙을 나르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 1948년 여름에는「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남침용 도로신설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가구 1인씩 무조건 동원되는 것이므로 연로하신 아버지가 동원되어 일하게 되었고, 나는 방학 때 아버지와 교대해서 공사장에서 15일간씩 일했다. 탱크 두 대가 교차 할 수 있는 넓은 자갈을 깔은 도로였다. 지게, 삽 등 완전한 수작업이며, 헛간 같은데서 자면서 먹을 것은 각자 지참했으며, 모든 노력동원은 당연히 무급이었다.

 - 1948년부터 내내 평강군 현내면의 비행장(북한 최남단 비행장)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된 平康郡의 각 지역주민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매일 15∼16명이 일주일씩 교대로 숙식하며 비행장 신설 공사에 투입되었다.

 남침준비공사 1948년 여름부터

 각자 밥을 해먹도록 되었지만 옥수수, 좁쌀 등 가져온 식량에 김치는 우리 집 것을 먹었다.

 - 1949년 9월 김화고급중학교로 전학 온 후의 일이다. 전쟁 임박해서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와 군 트럭이 매일 밤새도록 김화시내의 우리집 앞을 지나 남쪽으로 전진 배치하는 모습을 보았다. 낮에는 조용하다 어두워지면 탱크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또 한편, 중부전선을 가로지르는 철원∼창도간의 전차 통학생의 등교도 약 1주일간은 일체 불가능했다.

 무장한 군인과 군수물자 수송에 모든 화차가 동원되었으므로 학생이나 일반 통행은 금지되었고 학생은 학교 안와도 괜찮았다.

 6·25 전쟁이 나고 3일 후「영용무쌍한 인민군은 남반부 서울을 해방시키고...」운운하는 방송을 해대고 있을 무렵 고등학교 2학년 전교생은 군에 끌어가려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귀가 안들린다」「눈이 안보인다」해라 하셨다.

 인민군 장교로 끌려갈 뻔했다

 어디선지 정보를 듣고 말씀하셨다. 그런데「안보인다」「안들린다」해도 신체검사 결과는 합격이라 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팬티 속에「돈 주머니」를 만들고 계셨고, 아버지와 큰아버님은「승만이가 죽게 되었구나」탄식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한에 친척 있는 사람은 불합격시킨다더라. 본명은「승만」인데 매일같이「이승만, 김 구 타도」소리 듣기 싫어서 임시로 용만이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는「남한에 친척있다」해라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종적인 개인면접 시간에 정치보위부 장교가「남한에 친척 있느냐」물었다. 나는 남한의 육촌형과 북한의 형과 삼촌 이름을 많이 대며 남한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호적등본을 들고 있었으므로 이름의 행열이 맞는 것을 보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면담자가 사방을 둘러보고 무엇인가 판결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알길 없었고, 밤새 한 잠도 못자고 아침에 학교에 가보니 나와 바로 내 앞에 면접받은 김정원 군만이 불합격이 되었다.

 뒤에 들은 소식은 그 때 끌려간 학생들은 장교로 임관되어 거의 다 죽었다 한다. 김정원군은 그 후 인민군 탱크 운전병으로 끌려갔다가 도주해 와서 나와 함께 월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령으로 예편해서 교통부 기획관리실장까지 했다.

 나는 신체검사불합격 소식을 들은 즉시 200여리 떨어진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추가령의 목장으로 피신해 갔다. 그 목장에서 수의사로 형이 형수와 살고 있었다.

 추가령 목장으로 열세살난 어린 동생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김화에서 평강에 와서 하룻밤 자고 세포면 추가령까지 이틀간을 걸어서 나를 찾으러 왔다. 군사증(제2국 민병등록증)을 받지 않으면 10년 징역에 벌금 물게 되어 있으니 즉시 받으러 오라는 아버지 말씀을 전하려고 어린 동생이 200여리를 걸어왔다.

 귀가길에 신작로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는데 인민군 짚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다가 멈춰섰다.「나는 잡으러 온 모양이다」고 가슴이 철렁했는데 그 장교는 자기도 쉬었다 간다했다.

 그 장교는 서울을 해방시키고 오는 길인데 서울에서 고려대학생을 붙들고「동무 독보회가 무엇인지 아오?」물었더니「대학생이 독보회도 모르더라」나는 아마도 서울에「고려대학」이 있는가 보다고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어떤 대학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알 길도 없었다. 독보회는 점심시간 또는 휴식시간에 모두 모아놓고「노동신문」이나「김일성 연설문」등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말하는데 남한에 그런 제도가 없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도대는 공비토벌의 길에

 9.28 서울수복에 이어 북한에 국군이 들어갔고 나도 공비토벌 한다고 금화의 북쪽인 금성 방면에 약 30名의 학도대원들이 갔다. 그 날도 치안대(경찰서내에 설치)에서 자고 떠나기 직전 집에 들려서 어머님께 금성쪽으로 공비토벌 가는데 같이 간다고 인사드렸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콩고물의 찰떡을 급히 구워서 먹고 가라 하셨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16年의 斷産 끝에 얻은 아들이라고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부엌에 서서 몇 개 먹고 떠났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 날 금성에서 일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서 학도대 본부인 김화시내 경찰서로 귀대 도중이었다.

 시내로 학도대가 3열종대로 행진해 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시내가 조용했고, 저녁때인데 집집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큰소리로 군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국군점령지역인줄 알고 군가부르다 기관총 세례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더욱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부를 때 난데없이 우리 숙소인 치안대 본부쪽으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나왔다.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면서 다 같이「학도대!」「학도대!」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앞서보낸 척후병 2명은 소식이 없고 기관총 소리가 더욱 요란했다. 날은 어둑어둑해졌고,「우리를 인민군으로 아는 모양이니 생창리 다리 너머 가서 자고 내일 시내로 들어가자」하며 철수했다.

 그 지점이 나의 집과는 불과 300m 이내로 지척이었는데 그것이 부모님 계신 곳을 먼 발치에서 바라본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각을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척후병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金策 부수상이 이끄는 인민군 패잔병이 시내를 어제 완전 점령했고 시내에서는「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하는 인민군 노래를 부르며 트럭이 질주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인민군 패잔병이 이미 금화시내를 점령하고 있었고, 후문에 의하면 척후병으로 나간 김형기 군 등 2명은 체포되어 즉시 총살당했다고 한다. 우리 학도대 일행은 남한에서 올라온 방위군 소위의 지휘로 산 능선을 타고 남한으로 향했다.

 마을이름도 기억 안나지만 한곳에서는 한밤중에 비상소집해서 나가보니 산 속의 민가에 인민군이 들어있으니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공격하기로 하고 산 속에서 포위하고 있었는데 새벽 동틀 무렵 잠복중인 학도대 쪽으로 예광탄이 2∼3발 날아오더니 집중 사격을 받았다.

 거꾸로 우리가 포위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소대는 풍비박산이 되었고, 도주하는 바람에 박격포의 포신과 포탄 갖은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서 박격포는 땅에 묻고 남쪽으로 산능성을 따라 걸었다. 때로는 점심을 얻어먹으러 들어간 집에 조금전에 산속에 있는 인민군이 300명분을 주문해 놓았다하여 서둘러 그 마을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인민군 포위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포위되고 있어

 이틀 후에 도착한 곳이 경기도 포천여자중학교 교사였다. 김화에서 피난온 피난민수용소가 되어 있었으며 한 교실에 200여명이 먹고 자고 하였다. 45일간의 피난민수용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하루 주먹밥 3개인데, 주먹밥 크기는 주먹의 반쯤 큰 것을 소금물로 쥐었으므로 찝찔했다. 물도 구해먹기 힘들었으므로 화장실 갈일도 별로 없었다. 때로는 15일간 용변을 보지 못했다. 먹은게 없으므로...

 그런 가운데<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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