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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묘하게 6·25에 참전했다

전쟁과 음모론과 실제

Written by. 지용우   입력 : 2010-03-11 오후 9: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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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실제로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은 그 내막을 잘 모른다. 그저 상부의 명령이 있으니 총과 대포를 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을 벌이는 진짜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당사국의 대통령이나 수상 장관 등 고위층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일찍이 프로이센의 장군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12살 때 군대에 들어가 5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39년간이나 군인의 삶을 살면서 7번이나 전쟁에 참전한 타고 난 군인이자 군사이론에 해박한 전문가다. 그의 주저인 '전쟁론'은 시대를 초월한 군사이론의 불멸의 고전으로 지금도 세계 각국의 군 고위층들 사이에 애독되고 있는 군사고전이다.

 ▲ 백선엽 장군이 발행한 명예제대증

 진주만 기습과 6·25남침의 공통점  

그의 말대로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필자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불씨를 당긴 1941년 12월 7일의 眞珠灣 공격과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저지른 6·25남침이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서로 기막히게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첫째, 두 전쟁이 모두 예고없는 기습침공으로 시작됐으며 일요일을 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요일이여서 진주만에 주둔한 미 태평양함대사령부의 예하장병들은 모두 외출허가를 받아 영외로 빠져나갔거나 댄스파티 등으로 마음 편한 주말을 즐기고 있었던 시점이다.  북한의 6·25남침 역시 일요일에 감행되었다. 전방부대의 경계태세도 크게 이완된 상태인 데다 장병들에게 농번기 휴가를 대폭 실시하던 중이었다. 게다가 육군 본부에서는 (진주만의 미 해군들처럼) 하필 6·25 전야에 댄스파티가 열려서 전쟁이 시작된 날까지도 고위 장교들이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후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예고도 없이 하와이를 기습침공하고 나서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북한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남침한 것도 유사하다.  일본의 침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될 당시의 세계정세는 어떠했는가.  미국과 영국 등 제국세력에 대항해 결성된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3국 군사동맹)의 하나였던 일본은 194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대한 대응책으로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협상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분쇄한다는 전쟁시나리오까지 준비하는 등 양면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자 예정대로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미국에 의한 이른바 '전쟁음모론'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동참을 권고하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도 동참하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고 일본의 선제공격기미를 알면서도 오히려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이다. 이 음모론을 강력 뒷받침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본이 침공했을 당시 진주만에는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의 즉각개입은 병주고 약주는 식의 전략·전술의 일환  

아리조나호 등 전역을 앞둔 구형 전함들만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쾌재를 불렀을 만큼의 큰 손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경제공황 뒤끝이라 미국으로서는 군수산업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과 연관시켜 보면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사실상 진주만의 상처를 빌미로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동시에 군수산업의 활발한 진척으로 미국경제는 다시 호황을 만난 것이 사실이다.  

논자들 중에는 한국전쟁(6·25)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시 외세(미국)에 의한 '음모론'의 범주에 속하는 하나의 '가설'이긴 하다.

물론 6·25는 북한의 김일성이 구상한 전쟁시나리오에 의해 감행된 '남침'전쟁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50년 1월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서 '남한해방' 전쟁을 소비에트가 지원해달라고 설득시킨 것이 주효해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전쟁이다.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게도 전쟁의 환경을 제공한 책임의 일단이 없지 않다는 얘기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적지않은 것이다.  

그 하나가 한국정부가 수립된해(1948년) 9월 15일부터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에 철수가 완료됨으로써 당시 국군이 완전히 자리도 잡기전에 남한에는 군사적 공백상태가 생긴 것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김일성 집단이 놓칠 리가 없다. 미국이 행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는 1950년 1월에 '한반도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공표된 사실이다.

북한이 대남 해방전쟁을 벌일 경우 미군의 참전을 우려해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가 애치슨라인이 발표되자 김일성은 바로 이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군은 참전 안 할 것이다"라고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고 본다면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미국이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 목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을 전적으로 묵살할 수만은 없는 셈이다.  

6·25 전쟁이 실제로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미군을 참전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병주고 약도주는' 식의 전략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 최대의 비극, 6·25는 이제 잊혀진 전쟁이 되었는가.  

나는 기묘하게 6·25에 참전했다  

북한 공산주의의 적화통일 야욕이 빚은 이 무모한 전쟁으로 남북을 합쳐 자그마치 450만 명이 숨지고 1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일찍이 인류사에 유래가 없는 처절한 동족살륙의 전쟁을 단지 흘러간 과거사의 한 페이지로만 흘려버릴 것인가. 지하에 잠들어 있는 호국 영령과 전쟁희생자유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6·25 한국전쟁에 참으로 기묘하게 참전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아침 10시쯤 대동청년단에서 왔다는 한 청년이 나의 형님인 지용순을 찾는다. 형님은 마침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그 사람은 들어오는 대로 청년단 사무실로 나오라고 전하라면서 일단 돌아갔다.  당시 우리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살고 있었다. 그 날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38선일대에서 남북간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처음엔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한 38선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국지적 충돌정도로 생각했다. 북한의 전면남침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한 시간쯤 후에 그 사람이 다시 왔다. 아직도 귀가 안 했다고 했더니 그럼 동생이라도 대신 왔다 가라는 것이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수원서 탱크폭파 특공대 자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동청년단 사무실에 가보니 비상소집된 청년단원들과 나처럼 대리로 나온 또래급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때부터 아예 문도 잠가 버린 채 화장실 가는데도 사람이 따라 다닌다. 행동의 자유가 완전히 유보되었다. 항의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 북한의 인민군(북한군의 속칭)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해 내려오고 있으니 여러분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상황설명이 전부였다.  점심도 굶은 채 우리는 서대문쪽으로 행진해 갔다. 영천(독립문)쪽에서도 수백 명이 대오를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합쳐진 인파가 모두 6,7백 명은 되었다.

나는 나의 요구가 묵살될 줄 뻔히 알면서도 내일 학교에 가야 하니 집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나는 선린상업 5학년(당시 학제)에 재학 중이었다.  "전쟁이 났는데 무슨 놈의 학교냐"며 면박만 돌아왔다. 간간이 부슬비가 내리면서 어둠에 싸인 25일 밤, 우리는 계동 휘문중학교 강당에 일단 잠정 수용되었다. 그날 밤은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26일) 아침 우리는 종로5가 쪽으로 행군해서 어느 트럭정비공장 안으로, 흡사 서부영화에 나오는 소떼마냥 밀려서 쳐 넣어 졌다. 잠수 후 3대의 대형트럭이 군복을 잔뜩 싣고 와서 부린다. 각자 맞는 치수대로 군복을 입고 졸지에 계급도 없는 군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도보로 서울역까지 가서 대기중이던 기차(지붕이 없는 無蓋車)에 실려졌다. 그것이 가족과의 기약도 없는 이별의 시작읻.  우리를 태운 열차는 수원역에서 멎었다. 초등학교를 전시징발한 임시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신병훈련이래야 소총도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채 맨몸으로 하는 제식훈련에 불과했다. 이날 몇 끼를 굶은 신병들에게 지급된 식사는 설익은 보리밥과 소금국에 가까운 시금치국이다.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 훈련병들로 화장실에서 요란한 '설사혼성곡'(?)이 울려 퍼진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7일 낮에는 전 훈련병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상부의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북한의 기갑부대(탱크)를 쳐부술 육탄특공대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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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지용우 선생님의 글을 읽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대목이 간간히 있는 매우 귀중한 경험담을 읽었다고 생각됨니다. 지용우선생님은 나라를 지키신 일등 공신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며 나라와 국민들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할 분임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

    2010-03-12 오전 12: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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