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6.25를 통일전쟁이라 하는가
보건데 남침적란(南侵赤亂)을 남하(南下)로, 북괴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전면전을 개시한 것을 제한적 무력사용으로, 서울에서 군사전략상황판단에 따라 지체한 것을 '국회소집하여 통일정부수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종북주의자로 잘 알려진 강모의 내전론(內戰論)은, 전후에 공개된 중공과 소련의 비밀문건들에 의해 잘못된 논설로 폭로된 커밍스의 수정론을 넘어서, 심지어는 "한국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외세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쟁"이라 말하고 있다.
이제 60주년을 한해 앞두고 다시 찾아 온 6.25를 맞이하여, 특히 남한국민이 그렇게도 비참하게 당했던 그 전쟁이 과연 우리민족이 원하는 민족통일전쟁이고 남한해방전쟁이었던가를, 당시의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 특히 스탈린과 모택동 그리고 그들의 꼭두각시였던 북한괴뢰정권(* 6.25전쟁에 관한한 이 용어의 사용은 의미 있다)의 안보전략상과 연합전략작전 그리고 북괴의 남한점령실상을 통해 재인식해 보기로 한다.
6.25는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의한 '南侵赤亂'이다
1920년 10월 하순, 만주간도에서는 일본관동군토벌대를 상대로 우리 광복군이 쟁취한 역사적인 청산리대첩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전장에서 우리 광복군의 영웅들(지휘관 ;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최동진 등)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로 인하여 일본군의 대규모토벌전에 쫓겨 간도전역에서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단 밀산(密山 ; 1910년에 만주와 연해주국경선에 조성된 독립군기지)을 거쳐 이청천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단과 함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의 연합전선구축제의를 받고, 이들 광복군지도자들은 그것이 광복군정신에 맞지 않아 간도로 다시 회귀하였다.
그래서 광복군주류는 간도를 3개정치 및 군관구로 재편성하고 광복전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27년부터는 소위 일본관동군과 만주 장학량 군벌정권의 야합에 의한 독립군토벌작전과 새로이 공산혁명을 표방하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힘겨운 생존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이제 만주에서 왜적을 앞에 놓고도 ‘민족주의자는 공산당의 적’으로 선포하고 민족주의유지들에게 테러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박용만장군(무력광복전쟁을 주장하던 선구자)을 비롯하여 청산리대첩의 민족영웅 김좌진장군을 1930년 1월에 암살하고, 이청천장군도 위협하였다.
이것은 한국공산주의자들이 광복운동의 민족정신을 잃고 이제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의 한 괴뢰로 전략했음을 의미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북만주지역 민족주의계열 광복군선구자들은 대동단결하여 1930년 7월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함으로서 남만주의 공산-민족연합계의 국민부(조선혁명군)와 공존하면서 광복전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일제관동군의 만주침략으로 32년에 괴뢰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인과 한국인들의 항일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이청천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주로 만주인 항일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정식으로 ‘한중연합토군’(韓中聯合討軍)을 구성하여 관동군을 게릴라전으로 농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이었을 뿐 한국독립군은 공산당의 와해공작과 관동군의 증강된 토벌전 등등으로 연합작전이 지속될 수가 없었다. 1933년 10월에는 한중연합작전 중 공산당 오열의 간계로 중국 오의성부대가 우리 광복군을 포위 무장해제시키고 이청천장군도 감금하는 불심사태가 야기되자 이를 계기로 한-중연합작전은 파기되고, 광복군 또한 와해되면서 ‘한국독립군’의 광복전쟁은 소멸되고 말았다. 이청천장군도 임정의 김구수반에 의해 구원 되 임정으로 탈출해 감으로서 만주의 민족계열광복군전쟁은 1934년경에 소멸되고 말았다. 한편 남만주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도 중국자위군과 연합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역시 1936년에 왜군의 모략으로 지휘관을 잃고, 38년까지 버티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제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된 (위장)광복전쟁뿐이었다.
한편 만주성 중국공산당도 1932년에 일제세력이 미치지 않은 지역에 ‘소비에트’를 수립하고 중공만주공산당유격대(1933에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는데, 그 중에 주로 한국인거주지역의 유격대가 동․남·북 만주지역일대에서 조직되었다. 이 부대들의 구성원 대부분은 한국인이었고 그 지휘관도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 이제 민족진영광복전쟁이 소멸되고 괴뢰만주국 중국인의 텃세가 심해가는 과정에서 그곳 주민들은 투쟁이념의 공감은 차치하고서라도 실질생존문제가 해결가능한 단체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한인 공산유격대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헤게모니장악을 위해 조작된 소위 ‘민생단사건’(1933~5년 ; 일제하 한국인자치정권수립을 모의)으로 대부분 숙청(학살) 당하고, 중공 등 국제공산주의혁명세력에 충실했던 김일성(이 때 나이 19세)을 비롯 소수요원만이 생존하였다.
1934년, 만주에 들어 온 조봉암이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결성하였으나, 그 직후 코민테른방침에 따라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로 흡수되자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이제 우리민족광복운동보다 민족간에도 계급투쟁중심의 국제공산주의혁명운동을 앞세웠다. 1935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제인민전선(전략정책)’ 즉 소수민족과의 연합에 의한 통일전선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쟁총동원령이 지령되었다(코민테른의 지령 즉 테제는 전세계공산당원에게 ‘신의 뜻’으로 받아드려진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도 국부군과는 합작전선(실제로 36년 12월에 국공합작달성)을, 그리고 국내 전 소수민족 특히 간도 한인민족과는 ‘한-중 항일연합군’(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만주지역의 조선인 공산당은 우선은 만주지역 중국공산당정권수립을 위해, 그리하여 성립되는 중공동북성정권 밑에 한인자치구(간도조선자치구)를 얻기 위해 중공동북성(만주)공산당의 종속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근거지를 잃었던 제2군 제6사(지휘관 김일성)는 동만으로 돌아와(1936.3) 국경지역(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지역) 밀영(密營)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중 한 예로,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6사의 60여명 유격대가 함경남도 혜산진의 보천보면(인구 약 1400여명의 소읍)을 습격했던 이른바 북한이 자랑하는 ‘보천보전투’도 있었다.
그런데,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유격대활동에 불리한 1939년 겨울부터 또 다시 본격적인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괴멸상태에 빠져 소부대단위로 분산하여 연명을 강구하하던 중, 1940년 3월, 코민테른이 소집한 제2차 만주빨치산 지휘관회의에서 전멸상태인 동북항일연군을 임시로 소련영토로 피난시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전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제2군 즉 한국인유격부대들도 9월까지 소련령 하바로프스크로 도피 및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곧 하바로브스크 소련군 산하 ‘88 특별여단’으로 재편되었다. 이 부대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연합부대로 소련군예하에 편성되어 - 1944년 9월 현재 총수는 1007명이고, 그 중 조선인은 100명(유격대원 86명 포함)이었다 -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4개지대 중 제1지대가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지휘관은 김일성)되었다.
이제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임정과 광복군 그리고 국내외선구자들이 외롭고 굶주리면서도 심신을 다하여 광복전쟁에 임하고 있는 동안, 이들 김일성계파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민주주의 조국건설’ 아닌 오로지 ‘스탈린이 지배하는 국제공산주의혁명을 위한 붉은 공화국건설’, 즉 민족의 번영이나 국민(전 계급)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세계지배를 위해 여타계급을 말살하거나 아래로 지배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가차 없는 반당종파분자의 숙청을 통해 유일독재권을 확보해 나가는 등의 대형주의(大兄主義)세계체제를 정밀하게 음모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미국의 권고에 따라 소련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만주와 북한에 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을 8월 27일까지 점령해 나가면서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의 극동군사령부(군사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평양에 민정사령부(즉 군정청의 위장명), 각지방에 위수사령부를 두어, 소련정치장교들의 감독과 감시 지도하에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지방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8.27~10.26)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인수하게 하는 한편,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정치공작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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