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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전투' 산증인 학도병 손대익씨

'공부보다 나라가 우선' 자원입대..금화전투 전공으로 두 차례 무공훈장

Written by. konas   입력 : 2010-04-29 오후 1: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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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운이 좋아 살았지만,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먼저 간 학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밤잠을 설치게 하는 악몽의 한국전쟁.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고향인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서 대한노인회 송라분회장으로 활동하는 손대익(78)씨의 한은 아직도 풀리질 않는다.

   손씨는 6.25전쟁의 산증인이다. 학도병으로 변변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백인엽 장군이 이끌던 제17연대에 배속돼 포항 기계전투를 시작으로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강원 금화전투 등 그야말로 '4대 전투'에 소총수와 수색대로 나섰다.

   비록 군번도 계급도 없고 총도 한번 쏴보지 못한 채 참전했지만, 정통 학도병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손대익씨

◇오로지 '구국의 일념' = 손씨는 6년제인 포항중학교 6학년 때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7월10일 친구 10명과 뜻을 모아 학교 측에 입대를 자원했다. 오로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학교에서 자원입대한 학생은 이들 11명과 후배들을 합해 모두 35명. 당연히 이들 모두의 학적부에는 '학도병 자원입대'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손씨는 각지에서 모여든 700여명의 학도병과 함께 대구농림중학교를 거쳐 곧바로 동부초교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무기도 없이 제식훈련만 받고서 다른 300여명과 함께 의성 북쪽에 주둔해 있는 제17연대에 배속됐다. 그러고 나서 8월 중순 군번도 계급도 없이 포항시 북쪽의 기계면에 투입됐다.

   당시는 북한군 12사단과 정예유격대 제766부대가 포항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기계면 방면으로 진격해 상황이 다급했다. 이에 우리 군은 더는 물러설 수 없어 배수의 진을 치고 반격에 나서 기계면을 거쳐 비학산까지 공격, 수많은 학도병의 희생 속에 기계면을 탈환했다.

   그러나 이후 적군의 총공세로 다시 기계-안강 간 도로가 차단되고 결국 우리 군이 기계면에서 철수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졌다.

   "후방고지로 철수하고 나서 늘 붙어 다니던 동료 학우 2명과 모여앉아 국군의 화력열세에 울분을 터트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총소리와 함께 전우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어. 같이 있던 친구 2명도 바로 옆에서 쓰러졌는데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 혼자 총을 안고 적이 있는 곳으로 굴러 천우신조로 빠져나왔어. 운이 좋았는데 전사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한동안 너무 괴로웠어".

   당시를 회상하던 손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선지도 모른 채 인천으로 = 기계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손씨는 그해 8월 하순 어느 날 부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인천상륙작전 참전의 첫 걸음이었다.

   "배를 타고도 행선지를 몰랐어. 다만, 수도권 탈환작전에 투입된다는 말만 들었지".

   손씨가 속한 17연대는 미 해병대의 뒤를 이어 후위로 월미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인천을 거쳐 곧바로 서울 동작동 방면으로 진격해 한강을 건넜다.

   손씨는 "인천에 들어서자 피난을 못 가고 숨어 있던 시민이 태극기를 흔들며 어찌나 열렬히 환영하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감격스러워. 그런데 한강을 건널 때는 한강다리 폭파 때 희생된 수많은 시체가 그때까지 떠다니는 참혹한 광경도 잊을 수가 없어"라며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쳤다.

   손씨는 "소총 하나만 달랑 든 일개 사병으로 비록 큰 전공은 못 세웠지만, 역사에 남는 전투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해 10월 소총소대에서 연대 수색대로 배치됐다.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서 인민군 소탕전과 자격능선, 백마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최일선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다 12월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중공군 생포.무기노획으로 무공훈장 = 6.25전쟁에서 손씨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전투는 단연 강원도 금화전투다.

   금화지역은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던 곳. 1951년에는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 지역이다. 그해 8월. 손씨는 5명으로 구성된 수색대 조장이었다.

   안개로 10m 앞도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손씨는 대원들과 함께 인근을 수색하던 중 민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접근해 낡은 군화로 보이는 신발을 발견하고 집을 덮쳐 방안에 있던 중공군 5명을 생포했다.

   또 인근을 수색해 위장한 중공군 트럭 5대와 트럭에 실려 있던 고사포 5문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공로로 그해 12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손씨는 "워낙 감쪽같이 위장해 처음에는 그냥 초가집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트럭 앞부분이 보였다"며 "트럭을 아예 집으로 만들어 놓았더라"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1952년 2월 금화 오성산의 무명고지. 손씨는 이곳에서 야간에 적진을 기습해 전투를 벌이던 중 오른쪽 발에 수류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됐으나 치료 후 곧바로 원대 복귀했다.

   "참전 이후 처음으로 다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다른 전우들에 비해 그것도 큰 행운이었어. 후방으로 후송되면 대부분이 나아도 복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난 낫자마자 다시 복귀했지. 그때는 무조건 복귀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있었던 것 같아".

   전투와 부상, 원대복귀로 손씨는 1952년 6월 다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경기도 포천 5군단 정보처 근무를 마지막으로 1954년 7월 하사로 만기제대했다.

  
◇교육자의 길..안보의식 절실 = 제대 후 손씨는 포항수산대학에 입학해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이후 준교사를 시작으로 24년간 대구.경북지역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12년간 포항.경주지역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는 등 43년간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

   손씨는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안보의식을 가르쳤는데 요즘은 학생들이 진학에만 신경 써 안보교육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제대로 된 교육이 너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도병 예우에 대해서도 불만이다.

   학도병은 일반징집자와 달리 나라를 위해 학업도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친 진정한 애국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손씨가 받는 연금은 월 15만원. 무공훈장 수훈이 명목이고 그나마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는 발 부상은 시기를 놓쳐 연금대상에서 제외됐다.

   1996년에는 전쟁으로 산화한 고향 선후배, 동료를 기리고자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기계면 화대리에 기계.안강전투 전몰장병 위령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는 "나라가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한국전쟁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모두가 애국자지만 특히 학업과 인생을 포기하고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선 모든 무명의 학도병들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konas.net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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