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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생지옥' 수용소에서 귀환한 김학수씨

낙동강 전선 사수 뒤 최전방 태평 전투서 포로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어".."애국심 키워야"

Written by. konas   입력 : 2010-05-06 오후 2: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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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해 적의 수도를 점령했으면 승리감에 도취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가 않았어. 도로에 널린 양민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면서 정말이지 동족끼리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군인으로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전장에 뛰어들었던 김학수(82)씨.

   김씨는 `최후의 보루' 낙동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고 북진했으나 평안북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무려 2년10개월을 수용소에서 보내고 귀환한 6.25전쟁의 `산증인'이다.

   김씨는 "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라면서 전쟁의 참상과 헐벗고 굶주린 채 쓰러져 간 전우를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후퇴를 거듭해 낙동강까지 = 1950년 6월5일 서울로 휴가를 나와있던 김씨는 여관에서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창문 밖에 군용 차와 헌병대가 어지럽게 지나다니고 있어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더니 "전쟁이 터졌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곧장 근무지인 강원도 원주 국군 6사단 19연대로 연락을 넣었으나 부대는 이미 적의 공격을 받고 후퇴 중이었다. 청량리역으로 뛰어가 기차를 탄 김씨는 오후 4시께 춘천에서 가까스로 부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부대는 소양강 둑을 기점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적의 화력은 무시무시했다.

   "우리는 81㎜ 박격포밖에 없었는데 적의 전차는 무적이었어. 아군은 공격도 못해보고 적의 전차가 밀고 내려오는 만큼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
전선이 정비되지 않아 어떤 물자도 보급되지 않았다. 식량은 남쪽으로 피난한 양민의 집이나 밭을 뒤져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비가 많은 여름인데다 날마다 땀을 흘려 군복 허리띠는 곰팡이가 펴 썩어버렸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대항할 힘이 없다는 무력감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군의 어깨를 짓누르던 7월 중순.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는 더는 후퇴할 수 없다. 낙동강을 사선으로 생각하고 지켜라"라는 특명을 내렸다.

  
◇참혹한 전쟁.."윤리도 도덕도 없어" = 대통령 특명이 나오고 나서 김씨의 부대는 낙동강변 상주와 함창 지역을 사수했다.
군인들은 낙동강을 건너려고 `W130선'이라고 불리는 군대에서만 쓰던 전화선을 소 꼬리에 묶어 소를 홍수가 난 낙동강으로 떼밀었다.

   소가 강을 건너면 군인들은 강을 가로지르게 된 전화선에 의지해 강을 넘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굶주림에 걸어갈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사 직전의 군인들은 피난민 집에서 발견한 구정물 통을 기울여 윗물을 따라내고 찌꺼기를 건져 먹었다. 가축의 똥인지 음식물 찌꺼기인지, 누가 언제 버리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배를 채워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찌꺼기를 먹고 나면 뱃속이 요동쳤고, 동료는 식중독으로 설사를 거듭하다 죽어나갔다. 하지만, 시신 수습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쟁이 터지자 부모가 자식을 버렸고, 자식도 부모를 버렸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 윤리와 질서가 한꺼번에 붕괴하고 있었다.

   "날마다 비가 와서 홍수가 났는데 어린애를 업은 여자들은 강을 건너다 힘들어지면 우는 아이를 떠내려가는 물에 내버렸어. 아들은 늙은 부모가 자기 허리춤을 붙잡고 `함께 강을 건너자'라고 애걸복걸해도 그냥 뿌리치고 가버렸어."

◇`생지옥' 포로수용소 = 9월이 되자 전선이 전방과 후방으로 정비되면서 물자가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 김씨의 19연대도 북쪽으로 진격했다.

   북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무혈 전쟁'이었고 이대로만 가면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았다. 맥아더 사령관도 "유엔군은 2주 후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압록강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공군이 느닷없이 10월31일 밤 태평 지역을 공격했고, 김씨의 19연대는 부대 내 차량을 모두 폭파시키고서 어둠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김씨는 남쪽을 향해 뛰었지만, 갑자기 왼쪽 어깨를 얻어맞고 산속에서 쓰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중공군 2명이 김씨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순간이었다.

   김씨는 평안북도 의주군 백마 면의 제8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 음식이라고는 강냉이 죽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강냉이 죽을 먹은 미군 포로들은 설사와 장티푸스로 매일같이 죽어나갔다.

   수용소는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군인들에게 나무 베기 등 강제노역을 시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휴전이 될 때쯤 포로는 500명에서 150여명으로 줄었다.

   일본강점기 형무소를 고친 수용소는 포로 20명을 한 방에 가두어 놓고 출입을 통제해 마치 교도소 같았다.

   적군은 `노동신문'을 가져와 자주 `독보회'를 가졌고 포로들에게 `반미구국투쟁연맹'에 가입할 것을 종용했다. 이를 받아들인 포로도 있었지만, 그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남한으로 귀환하지 못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말 김씨는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91㎏이었던 몸무게는 57㎏으로 줄었고 머리카락도 대부분 빠진 뒤였다.

  
◇"나라는 누가 지키나?" 걱정 또 걱정 = 손씨는 "지금이라도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노구를 이끌고 나서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다해야 할 젊은이들이 입대 후 제대할 날짜만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가장 한탄스럽다고 했다.

   안보 의식이 약한 이유는 유사시 나가 싸우다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서 참전 군인의 가족을 보호하고 응당한 보상을 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약자만 고생하고 지도층의 아들은 다 뒤로 빠져나간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절대 애국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참혹한 전쟁을 몸소 겪은 자로서 남북 간 전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며 전쟁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내는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지 알 수가 없는 지옥일 뿐이야."
목포상고 재학시절 미 군정 치하 경비대에 자원입대한 뒤 1948년 8월15일 국군 창설과 함께 군인이 된 김씨는 55년 특무상사로 예편했으며 현재 6.25참전유공자회 장성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연합)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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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재이야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김학수씨의 경험담은 안보가 튼튼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한다. 온 국민이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애국심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0-05-24 오전 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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