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결정적 전투들 - ⑥ 평양탈환작전
1950년 10월 29일 오전 9시 30분, 정일권 국군총사령관을 비롯한 군부요인들의 환영 속에 이승만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평양의 능라도비행장에 착륙했다. 이어 평양시청에 마련된 환영식장에 도착한 노(老) 대통령은 감격한 어조로 운집한 5만여 명의 군중에게 자신이 39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게 된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모두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우자!”라고 호소했다.
당시 평양은 인구 50만여 명으로 북한의 상징적인 도시였으며 역사적으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평양에는 을밀대, 모란봉 등의 유적들과 함께 시가지의 남쪽을 동서로 관통해 흐르는 대동강이 유명하다. 대동강은 강폭이 400~500m 정도로 유속이 매우 빠르고 깊어, 도섭이 불가능한 하천이다.
평양은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서쪽의 본평양과 동남쪽의 동평양으로 구분된다. 서울과 비교하다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되는 것이 비슷했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주요시설은 대부분 본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본평양이야말로 북한의 심장부 같은 곳이었다. 본평양과 동평양을 연결하는 교량은 인도교인 대동교와 복선화된 대동강 철교가 가설돼 있었다.
■ 국군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와 북진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주력이 붕괴된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거의 없었다. 당시 북한군은 후방지역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3개 사단을 신편한 후 우선적으로 평양 진입의 요충지인 금천 일대에 19ㆍ27사단 등 2개 사단을 배치하고 해주 및 배천 일대에 74사단을 배치했다. 또한 원산항에는 3000여 기의 기뢰를 설치했다.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지도부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더라도 유엔군은 38선 남쪽에서 멈춰 주는 것이었다.
북한의 기대와 달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은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먼저 10월 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하면서 북진을 시작했다. 그에 앞서 9월 27일, 맥아더 원수 역시 미 합참으로부터 북진을 승인받아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0월 7일에는 유엔이 북진을 결의함으로써 맥아더의 북진계획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됐다. 이어 10월 9일, 유엔군이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면서 북진을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부대로 1기병사단이 선정됐다. 그들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황주-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을 시작했다. 조공은 국군 1사단으로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토산)-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기동력·화력 등 전투력에서 유엔군 부대와 비교조차 어려운 국군1사단이 평양탈환 조공부대로 선정된 배경에는 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간절한 건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최초 군단의 예비임무를 부여받았던 그는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한국군과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적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데 한국군 부대가 빠져서는 안 된다.” 백선엽의 건의에 따라 최초 조공부대로 편성됐던 미 24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됐다.
미 1군단의 북진은 10월 9일 09시에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항전은 결사적이었다. 또한 곳곳에는 지뢰가 대량으로 매설돼 있어 제1기병사단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문에 기병사단의 공격은 11일까지도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해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켰다. 그리고 10월 12일 아침, 마침내 기병사단의 2개 연대가 북한군의 후방 한포리를 점령했다. 이어 기병사단은 14일까지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했다. 미 1기병사단의 양익포위 전술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지금까지도 양익포위 전술의 전형적인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 북한의 평양방어와 유엔군의 선두부대 경쟁
1950년 10월 14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황급히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황주-율리를 연한 외곽방어선과 대동강-동평양을 연한 내곽방어선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8군사령부는 “북한군의 평양방위부대는 북한군 17사단과 32사단 소속 잔류병력 8000명 정도일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평양을 방위하기 위한 것보다는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전쟁지도부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금천점령 하루 전인 13일, 이미 강계로 피신한 후였기 때문이다.
평양진격 작전에서 나타난 각 부대의 공통된 특징은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이고 각 사단, 사단 내의 각 연대까지도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경쟁심에 불타 있었다. 특히 미 1군단 내에서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들 중 가장 유리한 부대는 주공부대인 미 1기병사단이었다. 그들은 14일, 금천의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함으로써 평양공격의 기선을 장악했다. 또한 그들은 평양에 이르는 최단거리, 가장 양호한 기동공간을 가진 축선을 따라 공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 1기병사단은 서흥(16일)-사리원(우회)-황주(17일)-평양남측 흑교리(18일)-대동강 남쪽 도달(19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반면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마침내 10월 19일 11시쯤, 국군 1사단 12연대가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의 선교리로 진출했다. 이어 11연대가 14시쯤, 동평양의 북쪽 미림비행장을 점령했다. 따라서 12연대와 11연대는 차례로 동평양에 입성한 부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국군 1사단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11시쯤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철교를 폭파했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폭파작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정확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그 동안의 지체가 불가피하게 됐다. 10월 20일, 날이 밝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반면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1사단은 도섭지점을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일 밤에는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ㆍ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http://kookbang.dema.mil.kr/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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