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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과 남한 좌익'

④ 6·25동란시 북한통치 3개월간 이 땅에는 무슨 일이? ..청소년들 '의용군' 내몰고 민간인 학살 자행

Written by. konas   입력 : 2010-08-09 오후 4: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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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6·25동란을 일으켜 급속하게 남한 전역을 점령해 갔다. 북한군은 점령 즉시 각지의 좌익들을 끌어들여 인민위원회 설치 등 북한통치체제를 구축했다. 북한군과 남한 좌익이 합세한 공산통치는 3개월로 끝이 났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후 10월 초부터 전국 각지의 북한군과 남한 좌익들은 급속도로 북으로 퇴각했던 것이다. 이들이 지배하던 3개월 동안 대한민국 땅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공산치하의 민간인 피해는 학살, 실종, 납북, 의용군, 노력동원 등 다양했다. 이러한 피해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북한군과 남한 출신 좌익세력들의 합작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첫째, 의용군 강제 동원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이 주도하고 좌익들이 앞장서서 젊은 청소년들이 자원하도록 유인하고, 때로는 마을마다 가가호호 수색해 강제적으로 끌어 모아 낙동강 전선 등 전쟁터로 내보냈다. 3개월 동안 약 15만 명이나 되는 젊은이가 ‘의용군’으로 동원됐다. 김일성은 1950년 8월 15일 해방 6주년 기념연설에서 “공화국 북반부에서는 벌써 근 80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이 인민군대에 자원병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공화국 남반부에서는 벌써 근 40여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농민들이 의용군과 빨치산에 지원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엄청난 희생자가 난 낙동강전투 등에 북한군을 대신해 투입됐다. 북한군은 이들이 전장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에 쇠줄을 묶고 싸우게도 했고, 나이 어린 ‘의용군’들에게 술을 먹여 돌격시키기도 했다.

 북한군 출신 포로들에 의하면 13사단, 15사단 등 각 부대의 70~80%가 남한 내에서 징집한 병사들로 구성됐으며, 군관 및 하사관들은 북한 출신이었다.

 둘째, 6ㆍ25동란 납북자들이다. 납북의 수는 1952년 정부가 작성한 ‘6ㆍ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 따르면 8만2959명이고, 통상은 약 1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술돼 있다. 납북자들은 국회의원은 물론 공직자ㆍ정당 간부ㆍ대학교수ㆍ예술가ㆍ종교인ㆍ기술자 등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필요한 인사들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싹쓸이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인사들을 가가호호 뒤져 체포하는 데 남한 좌익들의 역할이 컸다.

 셋째, 민간인 학살이다. 1952년 10월에 발간된 ‘대한민국통계연감’에는 북한군과 남한 좌익이 합세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 수가 12만2799명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민간인 처형은 인민재판을 통해서도 이뤄졌지만 무단 처형 방식으로도 이뤄졌다. 인민재판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처형방식으로, 공터에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반동분자를 끌고 와 죄목을 나열한 후 누군가가 “저 사람은 반동분자다. 죽여야 한다”고 선동하면 그대로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북한군과 좌익세력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처단하는 방법이 인천상륙작전과 9ㆍ28 서울수복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다른 큰 변화를 보였다. 인민재판 등을 통한 선별적 학살에서 무차별 학살로 전환된 것이다. 서울수복 이후 후퇴하던 북한군과 남한 좌익은 패닉상태에 있었으며, 보복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씨를 말리는 집단처형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9·28 서울수복 전후 전국 곳곳에서는 집단처형된 시신들이 발견됐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시신이 발견됐다.

 민간인 학살의 최대 피해자는 호남지역이었다. 1952년 3월 31일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6ㆍ25사변 피살자 명부’(5만9964명)에 따르면 전남 4만3511명, 전북 5603명 등 4만9114명이 피살됐다. 이는 명부에 나타난 피살자의 83%에 이르는 수치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것은 영광지역이었는데, 2만1225명이 피살됐다.

 호남지역이 가장 피해가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들이 후퇴 길에 올랐는데, 강원ㆍ경상 등 여타 지역에서는 북으로 후퇴하는 길이 확보된 반면 호남지역은 후퇴로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군이 점령한 3개월 동안의 악몽은 국민들로 하여금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자연스럽게 반공의식으로 무장하게 한 원인이 됐다.(출처:국방일보)

<현대사상연구회 ‘6·25동란과 남한 좌익’ 집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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