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판 "조공국가(朝貢國家)" 북한
국제정치를 18세기 이전 왕조 시대로 되돌리는 북한과 중국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인 공자의 가르침, 즉 유가사상(儒家思想)은 인간 개인들 각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위에서 올바른 역할을 할 때, 사회에는 질서와 평화가 유지 될 수 있다고 본다.
왕의 자리가 있고 아버지의 자리가 있으며, 아들의 자리가 있고 형님과 아우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아내의 자리가 있으며 남편의 자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들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하고 서로 맞먹으려 할 때 그런 사회는 혼동과 무질서가 초래 된다. 그런 사회는 인간 사회가 아니라 금수(禽獸), 즉 개, 돼지의 사회와 같다.
중국 사람들은 수직적 상하 관계의 인간관계를 질서와 조화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사회 질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한(漢) 나라 시대부터 국제정치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중국이 중심이 된 국제정치 체제는 국가들의 상하관계가 분명히 규정 되었던 유교적 국제질서(Confucian International Order)였다.
유교적 국제질서는 중국을 정점으로 하고, 중국 주위에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침으로서 스스로의 주권을 포기 하는 대신, 중국이 제공하는 경제 및 정치적 보장을 받는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양 국제정치학자들 중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국제질서에 속한 나라들을 “독립국가” 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조공을 바치는 나라를 독립국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은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임을 자칭했고 다른 나라들의 지도자는 황제 보나 낮은 직위인 왕(王) 이라 칭했다. 왕보다 낮은 급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직함을 공(公), 후(候) 등으로 칭했다. 중국이 통일을 이룩하기 이전 중원에 존재했던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힘에 따라 공이나 후를 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들 중에 힘이 증대되어 왕을 칭하는 자가 나오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 치고 받고 싸웠다. 소위 춘추시대 말엽부터 전국 시대에 이르는 시기가 그런 시대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秦)나라 왕은 자신을 황제(皇帝)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秦始皇帝) 였던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중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 지도자들과 특이한 국제관계를 형성 했다. 작은 나라의 왕들이 스스로 중국 황제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중국은 이들 작은 나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 해주고 더 나아가 물질적인 지원을 해 준다는 제도를 설립했던 것이다. 바로 조공-책봉(朝貢-冊封) 체제라 불리는 국제제도가 형성 되었던 것이다.
조공이란 문자 그대로 중국 황제가 거주하는 궁전(朝)에 나아가 좋은 물건을 선물(貢)로 바친다는 의미다. 조공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조공이 불실할 경우 중국은 작은 나라를 군사력을 동원해서 혼 내 주었다.
중국은 조공을 받는 대신 작은 나라 왕들을 인정해 주고, 그들의 정통성을 보장 해 주었다. 작은 나라의 왕은 중국의 승인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 자리의 정통성을 보장 받았다. 이것이 바로 책봉(冊封)인 것이다. 조공을 바친 대가로 중국은 작은 나라의 왕을 책봉(임명하고 정통성을 보장) 해 주었던 것이다.
이 같은 관계는 엄밀하게 말해 국제관계가 아니었다. 중국만이 주권을 행사하고 나머지나라들은 종속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1500년 이상 지속 되었던 중국적 국제질서는 1842년 중국의 청 나라가 자신이 보기에 서양 오랑캐에 불과했던 영국과의 전쟁(아편전쟁)에서 무참히 패함으로서 종료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도 서양식 국제질서가 유교적 국제질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왕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도자와 동격인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명칭도 바꾸었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다. 중국의 사신을 받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은혜를 환영하는 문) 앞에 독립문이 설립되었다. 조선도 형식상 중국과 대등한 나라가 된 것이다.
김정일이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4박5일 동안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 왔는데 바로 구시대의 “조공-책봉관계” 를 21세기에 다시 재현 하는 일과 같아 보여 기분 씁쓸하다. 과거보다도 오히려 못한 것은, 조공 사절단 대신 김씨 왕조의 왕 격인 김정일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직접 방문했다는 점이고, 그것도 궁전 (오늘의 개념으로 수도)이 아닌 중국의 변방인 만주로 가서 알현 했다는 점이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만주에서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로 오라 했다는 보도도 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 한 이후 발표된 조선 중앙 통신 보도문은 김정일이 “오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중 두 나라 혁명선배들이 고귀한 재부로 물려준 전통적인 조중 친선의 바통을 후대들에게 잘 넘겨주고 그것을 대를 이어 강화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지닌 중대한 역사적 사명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후계문제와 더불어 극심한 경제파탄, 천안함 이후 국제적인 압박에 편할 날이 없는 김정일이 결국 국제적인 망신을 당해 가면서도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는 중국을 찾아가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아 온 모양이다. 그런데 김정일은 무슨 물건을 조공용 공물로 들고 갔을까?
물론 옛날 중국 황제들은 언제라도 공물로 받은 것 보다 더 값나가는 융숭한 선물을 하사함으로서 작은 나라의 왕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었다. 경제가 파탄 난 김정일이 중국에게 공물을 바치기는 어려웠을 터이지만 그는 중국에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선물’ 을 바쳤을 것이고 중국은 북한의 세습을 인정해 주고 원조를 통해 북한 정권을 유지 시켜주겠다는 현대판 책봉을 약속 했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 이지만 자신은 민족 자주를 지향하는 주체의 나라라는 북한의 꼴이 말이 아니다. 북한의 꼴이 단순히 말이 아닌 것을 넘어, 그 같은 행동이 단일 국가를 이루고 살아야 할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 행동인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과 중국의 행동은 모처럼 형성되고 있는 일민족일국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는 가장 소망스런 국가 형태) 달성의 기회를 지연 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동시에 민족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때마침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 시기는 일본으로 부터 당한 100년 전의 국치(國恥)를 반성하던 기간이었다.
북한의 행동은 중국의 어린이들로부터 조차 조롱당했다. 김일성의 새까만 후배들인 중국 위원(毓文)중학교의 토론방에는 “큰 뚱뚱이가 작은 뚱뚱이를 데리고 온다” 는 글이 올라 왔다고 하며, 중국의 네티즌 중 한명은 “명나라 관례에 따라 김정은을 조선의 세자(世子)로 책봉해야 한다” 며 비꼬았다. 다른 네티즌은 “언제 조선성(省)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지?” “김뚱뚱이(김 위원장 지칭)가 아들까지 구걸을 시키고 있다.” 는 글도 있었다.
북한과 중국은 국제정치를 18세기 이전 왕조 시대의 국제정치로 되돌리고 있다. 21세기 대명천지, 세계화의 시대에 자기 나라 국가원수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숨기고 있으며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비밀에 부치는 그런 나라들이 바로 북한과 중국이다. 천안함 이후 우리 국민들이 얻은 교훈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일이 바로 지난 며칠 사이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다.(konas)
李春根(이화여자 대학교 겸임교수/미래연구원 연구처장) http://blog.naver.com/choonkunlee
천안함 사건이후 국제적 압박에 편할날이 없는 김정일이 중국을 &#52287;아가 가진 아부를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증스럽다. 북한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물난리에 오갈데가 없는대 조공이라니.....</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0-09-01 오전 8:5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