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청와대 기습 도발 잊지 말자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124군부대 소속 특공대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했다.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집단으로 이동하여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에 성공했다. 국군복을 입고 어깨에는 '경기도 유격사령부'라는 견장을 붙이고 있었다. 이들을 경기도 고양읍 삼봉산에서 발견한 우리 국민은 급히 하산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우리 경찰과 軍은 신속한 대응으로 청와대 기습 직전에 이들을 저지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1ㆍ21'사태다.
적 침투 및 작전경과?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받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침투 지점은 서부전선 美2사단과 한국군 25사단이 경계를 이루는 경로를 이용했다.
美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보낸 후 1월 19일 밤 8시 30분경 결빙된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낸 31명은 1월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왔으며, 1월 21일 밤 10시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에 이르게 된다.
검문에 나선 경찰관이 신분증을 요구하자 이들은 "방첩 대원들이다"라고 답했다. 계속적인 신분증 요구에 이들은 "우리 부대로 가자"라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여 무사히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약 400m을 더 올라간 시점에 아래쪽에서 지프를 타고 올라온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의 제지를 받게 된다.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최 서장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막아선 후 "소속을 밝히시오.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라고 물었고, 때마침 버스 두 대가 뒤따라 올라왔다. 순간, 후미의 버스를 지원 병력이 탄 차량으로 오판한 침투 부대원들은, 최 서장의 가슴에 총을 쏜 뒤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고 흩어져 달아났다. 자하문초소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우리 정부는 군 병력 총 1만 9213명을 동원하여 특공대 28명 사살, 1명(김신조, 27, 북한군 소위)을 생포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특공대 2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이중의 한명인 최재경 대장(한국군 중장)은 2000년 9월에 김정일의 선물(송이버섯 300상자, 당시시가 10억 원 상당)을 전용기에 싣고 서울로 와서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리고 작전 중 우리 군경과 국민이 다수 전사, 사망 및 부상을 당했다.
침투목적은?
청와대를 습격하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함이다. 이들이 장비한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 휴대), 대검 31정(전원 휴대)이었다. 1월 22일 새벽 3시경 인왕산 기슭에서 군·경합동수색대에 생포된 김신조는 당일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를 떼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온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김신조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남파조는 5개조 76명으로 구성되었다. 1조는 청와대, 2조는 미국대사관, 3조는 육군본부, 4조는 서울교도소, 5조는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목표로 삼았었다. 그런데 상부의 지시로 실제 남파 특수부대원은 31명으로 축소 됐다며 한국군과 경찰의 방비는 허술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일 당초 예정대로 5개조가 모두 내려왔다면 서울 시내는 쑥대밭이 됐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북한 124부대는 남조선 해방을 위해 선발된 북한의 최정예부대로, 완전군장으로 1시간에 산길 12Km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김신조 씨는 잘 알려진 것처럼 전향해 남한에 정착했으며, 결혼 후 교회목사로 활동 중이고 이름도 개명한 채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가 무력도발을 지시했는가?
바로 북한 김정일이다. 당시 김정일은 26세로 이미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후계자 업적에 눈이 멀어 있었다. 황장엽 선생(前 북한노동당비서, 1997년 한국으로 망명, 2010년 87세로 서거)의 회고에 의하면 김정일은 18살부터 후계자의 야망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군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한은 1962년 12월에 4대 군사노선(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을 채택하여 군사력 증강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군사력에서 대남 우위에 서게 되자 무력도발을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은 1967년 1월에 해안포로 우래 해군 당포함(PCEC-56함)을 격침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응징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 자신감에 찬 김정일은 잔악한 무력도발을 계속했다. 1968년 1월 23일 美해군정보함(푸에블로) 납치.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간 무장공비(120여명) 울진·삼척지구 침투, 1969년 4월 15일 동해상 미군정찰기(EC-121) 격추 등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당시 김정일은 후계자로서 야심을 키워오고 있었다. 이것은 현재의 남북한 안보상황과 유사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김정은은 2008년 8월 김정일의 뇌졸중 이후 군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2010년 9월에 후계자로 공식 내정되었다. 북한은 핵무장과 재래식 전력에서 한국에 비해 우세하다. 김정은(27)은 과거 김정일이 해온 대남도발을 2010년부터 26세의 나이에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은 지난 수년간 특수부대 병력을 12만에서 2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강했다. 한국군 특수부대의 10배에 해당한다. 이들은 한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어 언제든지 땅굴과 해안을 통해 침투도발을 해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북 억제력을 위해 군사력 증강에 서둘러야 한다. 지금이 방위세를 신설해야 할 시기다. 그리고 우리 국민이 모두가 북한 특수부대를 찾아낸다는 마음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조우하면 즉각 신고해야 할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KONAS)
김성만(예비역 해군중장. 성우회/재향군인회 자문위원, 전 해군작전사령관)
이거 보고도 별로라고 하면 그건 취향인겁니다. http://blog.joinsmsn.com/carreau/12025390 우리는 그안에서 분류하고 조정하되 차별과 선입견을 갖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의 성향의 따라 갈리는 것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전체적인 스텟을 보고 평균을 보고 결정해야하지않을까요</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
2011-01-21 오후 2:50: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