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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알고 있다

Written by. 김현석   입력 : 2011-01-22 오전 9: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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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염으로 온 국토가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삼복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2010년 8월 10일. 우리 가족 18명은 아침 일찍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와 아내, 아들 내외와 그 아들과 딸, 큰딸과 그 아들과 딸, 큰 사위는 회사 사정으로 불참, 둘째 딸 내외와 아들과 딸, 셋째 딸 내외와 아들 딸, 총18명의 대부대였다. 이렇게 총출동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10여 년 전에도 서 너 번 다 모여서 여름휴가를 즐긴 일이 있으나 큰 아들 흥배가 어머니 아버지 다니실 수 있을 때 모시고 다녀야 한다며 애써서 주선한 여행이다. 각자 제주도 여행은 몇 번씩 해 보았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무더운 날씨지만 방학 때가 아니면 이렇게 모일 수가 없다.  안전한 여행을 빌면서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밤에 비가 내려서 산하가 더욱 깨끗해 보인다. 구름 사이로 어디쯤 왔나? 내려다보니 LNG탱크 수 십 기가 보인다. 평택항이다. 건너 서쪽에 고향땅 당진이 보인다. 언제 보아도 정겨운 모습이다. 곧 오른쪽으로 새만금 방조제의 거대한 모습도 보인다. 환경문제로 논란이 있으나 우리나라 국력의 상징이 될 듯하다. 추자도 상공쯤이라고 생각하며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가려 추자도의 아름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구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수시로 변하여 각종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뭉게구름이 조화롭다.
 
 제주 국제공항에 안착하여 2박 3일간의 관광과 교육여행이 시작되었다. 외손녀 맨 위가 대학 4학년, 외손녀 막내가 초교 4학년, 연령도 다양하려니와 외모 성격이 집안별로 구분 된다. 김해 김씨, 제주 고씨, 의령 남씨, 금녕 김씨, 외모와 걸음걸이 말씨로도 구별 된다. 날이 흐려 웅장한 한라산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예약한 25인승 버스가 마중 나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의 고향 사랑 정신은 우리나라에서 첫째다. 한라산과 바다 보물 위에 사는 제주도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래서 모두가 관광안내원이다.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데 제주도를 선전하는 선전물들 위에 “평화의 섬 제주도에 군항이 웬 말이냐” 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 제주도는 평화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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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제주도의 평화의 뒤에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지금의 제주도에는 평화 외에도 풍요로움까지 있다.  운전기사에게 “군항 건설지가 어디쯤이냐?”고 물어보니 서귀포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면서,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잘 되겠지요.” 하고 물어 보지도 않은 말에 군항건설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예약한 식당 덤장에 들어갔다. 상호부터 토속적 이다. 된장을 원료로 한 음식인가 했더니 생선과 해산물이 주 메뉴다. 덤장이란 말뜻을 물어 보니 바닷가에서 생선을 잡는 전통적인 고기잡이 시설을 말하는 것이란다. 덤의 뜻은 잘 모르겠으나, 장은 가둔다는 뜻의 장(醬)자이리라.

 육지에서는 대나무와 싸리 등으로 엮어 만드는 어(漁)살이 있고 돌로 가두는 돌 삵이 있다. 멸치를 잡는 죽방염도 있으니 아마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점심 식사 뒤에 제주도 서남단에 위치한 산방산 자락에 있는 하멜상선 전시관 용머리 해안과 송악산을 둘러보았다.  네델란드인 하멜은 1653년 (일행53명 )가파도에 표착하여 여러 병영에서 14년간 억류 되었다가 여수좌수영에 있던 동료 6인과 함께 탈출, 일본을 거쳐 귀국 한 후 하멜표류기와 조선국기(朝鮮國記)를 쓴 사람이다. 네델란드인들의 상혼과 용기, 탐험정신은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뒤에 있는 산방산은 산안에 방처럼 생긴 동굴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395m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모양이 특이할 뿐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연구가치가 많다고 한다. 제주도는 산방산과 서귀포 지대가 1차로 형성되었고 2차 3차 4차의 화산활동으로 현재의 제주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바다가 갯바위를 끼고 송악산에 올랐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악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는데 소나무는 얼마 없고 수령도 10여년의 작은 소나무들이 있는데, 바다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너무 아름답다. 쪽빛의 바다, 검은 기암, 푸른 소나무의 색깔과 모양이 어찌 그리 조화롭고 아름다운지! 지루하지가 않다.

 송악산 정상 해발 100m도 안 돼는 낮고 작은 산이지만 산정에 오르니 전망이 좋아 전망대로의 역할을 하는 지점으로는 최적으로 보인다. 바로 발아래 가파도가 있고 그 뒤에 우리나라 최남단섬인 마라도가 보인다. 제주 본섬만으로도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한데 부속도서를 개발하면 그 범위가 훨씬 넓어져 천혜의 관광자원이라고 자랑할 만하다. 하멜 일행이 표착한 가파도가 가까이 보이고 축구 경기장만한 마라도가 멀리 내려다보인다. 제주도 사람들은 가파도와 마라도가 외진 곳에 있는 것을 빗대어 그쪽 사람들이 진 빚은“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다.”는 우스개 소리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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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아내가 봐야 하는데, 힘들어 중간에 쉬느라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  마라도 너머 저 멀리 전설의 섬 이어도가 있는데, 수 천 년 전에는 독도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어도라는 말의 뜻이(古語) 흔들리다. 라는 뜻이라는데 아마도 수 천 년 전에는 먼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이어도, 암벽 섬이 높은 파도 사이로 아물아물 흔들리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인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이제 우리나라 국력도 세계 10위권이니 이어도 암반 위에 독도만한 철 구조물 인공 섬을 만들면 지금의 기상관측소 역할보다도 더 훌륭한 역할을 할 것 같다.  바다로 더 뻗어나가야 한다. 일본이 2차 대전을 일으킨 것도 강력한 해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남아를 휩쓴 일본의 해군력은 세계가 놀란 일이었지만 동해와 황해는 더 뻗어 나갈 곳이 없고 남쪽으로는 아직 여지가 있으니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해군력을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지나해로 더 뻗어나가고 무역루트를 지키려면 진해나 부산항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제주도 군항건설은 해양국으로서의 진출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평화를 지키는 일과 직결 되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냉 밀면과 돼지수육전문점인 산방식당에 갔다.

 예약을 하였는데도 줄서서 기다리란다. 제주도에는 벼농사가 되지 않아 밀 등, 잡곡 생산지인데 옛날에는 밀이 가장 귀한 주식이었을 것이다. 대표적 구황식물인 고구마는 1763년 (영조39년 ) 이후에, 감자는 1873년 이후에 들어왔을 것이므로 밀가루야 말로 제주도 최상의 식품이었을 것이다. 제주도 관광코스에 국수집이 더러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돼지고기 또한 제주도민이 가장 즐기는 육식인데 제주도 흑돼지는 전국 어디서나 명성이 높다.

 점심 식사 후에는 차밭 오설록에 들려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제주도 녹차가 성가는 높지만, 대기업에서 운영하고 있음으로 감귤처럼 제주도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작목은 아닌 것 같다.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하는 열대과일이 앞으로 제2의 대학나무가 될 듯도 싶다.  저녁 식사로 돼지고기 바비큐를 하기로 계획되었음으로 아들과 몇 사람만 장보러 가고 숙소 펜션에서 편히 쉬었다. 준비된 저녁 식사는 생선회 생선매운탕 그리고 돼지고기 바비큐 푸짐한 만찬이다. 가족들 모두가 포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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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은 (8월 7일)한림 공원에 갔다. 넓은 공원 조성에 많은 애로와 장기간의 고통의 흔적이 배어난다. 창업주의 용기에 감탄해 본다. 애향심과 개척 정신으로 쌓은 고원에는 각종 식물원과 민속 마을 외에 협재굴, 쌍용굴, 황금굴이 있어 관광코스로서의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 짧은 시간에 한 바퀴 돌았다. 지루하지 않은 편안한 코스다. 한림공원 바로 아래에 협재 해수욕장 과 금룡 해수욕장 이 있다.

 손자손녀들은 한림공원에 가지 않고 벌서부터 해수욕장에 가 있다. 어른들은 점심은 해물 탕으로 제주도의 향기와 맛을 즐겼다. 그리고 바로 협제 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해수욕장의 크기나 편의 시설들은 규모가 작지만 모래가 깨끗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들에게 안전하여 좋았다. 모처럼 바다 물에 몸을 담그고 태양광선으로 피부를 단련하였다.  앞에 보이는 비양도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롭다.

 성산이 일출 보는 명소이면 비양도는 석양과 낙조를 자랑할 만하다. 서귀포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평화 박물관에 갔다. 이름이 평화지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와 전쟁의 공포를 몸으로 체험했던 곳이다.  일제는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에 대대적으로 진지를 구축했다. 연합군이 한반도를 상륙하려면 제주도를 먼저 공략 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의 지하 요새를 구축했던 것이다.

 가마 오름이라는 작은 산봉우리 밑에 미로형 지하요새는 총길이 2km 1 .2. 3. 4. 지구로 구분하고 3층 구조로 되어있으며 땅굴 입구만도 33곳이나 되는 거대한 요새다. 땅굴은 이곳 요새 외에 해변을 따라서 여러 개가 있으며 우리일행이 송악산을 오를 때에도 7군데나 있는 것을 보았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격하려면 막 바로 상륙하지 제주도를 먼저 공략할까. 필요 없는 짓인데도 식민지 백성들을 억압하고 채찍을 휘둘렀던 침략자의 본심을 여기서 다시 느끼고 바라본다.  삽과 괭이 등, 사람이 육체노동으로만 진지를 팠으니, 강제 징용된 이들의 고생이 어떠했겠는가?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중장비를 쓰지 않고 인력으로만 구축하였으니 굴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현재 보수하여 관광하고 있는 일부구간의 복구 상태도 빈약하여 안전을 보장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태다. 이런 전쟁 유적지를 복구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도 중요 하지만 먼저 확실한 목적의식이 앞서야 할 것이다. 정부가 직접 복구한다든지 상당한 국고 보조를 해서 격조 높은 관광 자원이 됐으면 좋겠다.  평화박물관 선전표어가‘평화의 섬 제주!', '숭고한 희생정신!', ‘전쟁의 비참함!’‘평화의 소중함이다!’등 평화를 강조하다보니 초점이 맞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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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지하 요새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찬탈당하고 식민지의 피지배민족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현장인데, 우리가 할 일은 평화를 외치기에 앞서 대한민국이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무엇보다 투철한 민족의 정체성 위에 안보의식 고취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는 이런 내용이 보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는 평화, 평화, 외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길에 더 마(馬)파크라는 안내판과 선전간판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이곳의 선전표어도 “징기스칸의 검은 깃발이다.”로 징기스칸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선전하는 것과 말(馬)놀이가 주제다. “천 년 전 대륙을 뒤 흔들었던 장엄한 기마 전쟁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이런 포스타 표어는 언뜻 들으면 징기스칸이 제주도출신인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물론 말과 징기스칸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말의 테마공원이긴 하지만 주체의식과 역사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항몽(降(蒙) 유적지에는 몽골과 항전했던 역사의 현장을 복원 보존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징기스칸의 몽골군에 의해 제주도의 평화가 깨지고 말을 길러 몽골에 진상 했던 노예의 시대를 생각하며 말을 바라보아야 한다. 항몽 유적지도 제주도의 평화를 생각하면 제주도에서의 항몽 전쟁은 일본군의 지하요새 구축보다 더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숙종 10년 (단기 3438. 서기 1105)까지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 했을 것이나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평화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탐라국 제주도는 조선 기술이 발전하여 해상무역을 활발히 하였다는 기록도 없고 태풍을 이겨 낼 천혜의 좋은 항구도 없으며 조선에 필요한 질 좋은 목재나 (구상나무 잣나무 등은)있으나 대형 선박을 만들 기술과 경제력이 미약하여 국가로 존속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의 군현에 편입된 뒤에도 제주도민의 생활은 향상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멀리 있는 지역은 중앙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삼별초군의 제주점령과 항몽 전쟁 과정에서의 고통도 컸을 뿜만 아니라 그 후에도 고려로부터 귀여움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화도에서 패퇴한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자리 잡고 항쟁하게 된 후에는 삼별초군이 전라도 남쪽의 해안과 도서 지방을 장악하게 되었고, 원과 고려조정에서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즉 남송과 왜의 연결점임을 인식하여, 제주에 군사력을 증원하여 방어군 일천 명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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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삼별초군은 1270년 11월에 상륙하여 고려 방어군을 쉽게 격파 한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토착민) 관군에 비협조적이었다. 고 역사는 기록 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조정이 제주도민을 억압한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주도에 들어온 삼별초군은 3년 후인 1273년에 고려와 원나라의 함선 160척 과 군사1만2천명의 연합토벌군에 의해 패퇴한다. 이때 사망자말고도 1300여명의 군사가 포로 되어 잡혀갔는데 이중에는 상당수의 제주도민이 있었을 것이다.  삼별초군이 점령했던 3년 동안 제주도는 평화롭지 못 했다. 지금의 애읍일대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항 파두 (항 파두리 )성을 구축 하였다. 내성은 석축으로 700m 규모지만 외성은 토성으로 길이 6km의 긴 길이다. 네 개의 성문과 성내의 건축물 등, 부대시설과 공사에 제주도민 장정 대부분이 동원되었을 것이며, 삼별초군의 군수품공급에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의 고혈을 흘리게 하였겠는가? 국가를 위해서, 제주도민을 위해서 한 항쟁이 아니었다.

 둘째 날의 관광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쌍둥이 횟집에 가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고 신선한 회로 만찬을 즐겼다. 덤으로 주는 어패류의 가짓수 도 많으려니와 그중에서도 오분작, 이를 넉넉하게 주어 제주도 인심에 빠져들었다.

 셋째 날은 제주관광의 꽃 올레길 관광이다. 올레길도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는 외돌개에서 범환 포구 까지 4.5km 구간을 바닷가 절경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체험했다. 아내가 힘들어 하지 않을지 걱정이었으나 외돌개의 전설과 아름다운 풍경에 그런 걱정은 필요치 않은 것 같다. 

 외돌개의 올레길은 7구간의 시발점으로 유명하지만, 전부터 사진촬영소도 소문이 나있는 곳이어서, 바다를 바라보며 학생들 소풍 길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2km쯤 지났을 가하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길이 갑자기 바다로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처럼 정비된 길이 아니고, 해변 자갈 위에 길이 나 있으니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길 같지가 않다. 둘째 사위 남 교수가 남자아이들과 선두에서 걸어가는데, 고개를 갸웃뚱 하면서 두리번거린다. 겁이 많은 아내가 가지 말라고 소리 지르니 다들 멈춰 섰다. 자세히 지형도 살펴보고 행인들의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오기 힘들어 누구에게 여기 올레? 물어본다는 올레길인 듯도 싶다. 해변 돌 위에 조성된 길이니 평탄하지도 않고 큰돌을 밟고 넘어가야 하는 구간도 있는데, 어린이들이랑은 조심조심 열심히 잘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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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환 포구에 도착하니 두 시간쯤 소요되었다. 아내도 잘 걸었다. 둘레길 관광이 끝나니 큰일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점심식사로 오분작 돌솥밥을 전복 먹는 맛으로 맛있게 먹고 짐을 꾸려 돌아 갈 준비를 하였다. 오후 일정은 비행기시간까지 시간이 넉넉하였으나 마음은 한가롭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절물약수터 자연휴양림에 갔다. 수십만 그루의 삼나무 숲을 바라보니 절로 감탄이 나온다. 제주도 같은 토양에서 이렇게 울창하게 잘 자라니 감사한 일이다. 시간이 넉넉하여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었으나 오전의 올레길 워킹과 3일간의 피로 누적으로 나와 아내는 쉬고 싶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삼나무 숲 아래 평상에 누워 삼림욕을 즐기며 맑은 공기와 숲의 향기, 전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의 향기로 몸과 마음을 씻고 손자들이 절물약수터에서 떠온 냉수로 목을 축이니 피로가 싹 가신다. 지그시 눈을 감고 여유로운 제주도에서의 3일 간의 여행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이번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길에서 얻은 감회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과연 제주도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라는 것이다. 이제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를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60년 전만 해도 제주도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육지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수 천 년 척박한 땅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중앙 정부로부터 소외당한다고 생각하며 원통해하였을 것이다.

 국토의 끝자락 변방이란 서러운 곳인데 머나먼 바다길이니 오죽하였으랴.  6.25전쟁이 발발한 후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자리 잡고 육지의 많은 젊은 군인들이 제주도로 몰려왔다. 모슬포는 지금 보아도 기후 토양 등, 모두가 제주도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인데 당시에는 더 황량하였으리라. 이곳의 많은 여인들이 오직 육지로 진출하고 싶은 일념 때문에 훈련소 기간사병들과 교제하고 싶어하였다고 한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 것인데 많은 군인들이 가련하게 제주도 여인들을 많이도 울렸으리라.  그 당시만 해도 조혼하는 때였고 우리나라 인구 대다수가 농촌 출신이었으며 상당수의 군인들이 총각이라고 거짓말하여도 순박한 제주도 여인들은 의심하지 않고 순정을 바쳤을 터이니 그 군인들 대부분은 근무지를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니 제주의 많은 여인들이 외돌개의 망부석 같은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러웠던 일들도 따지고 보면 중앙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 백성의 서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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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보다 몇 년 앞선 1948년에 있었던 제주도 4.3사건은 제주도 역사상 가장 슬픈 역사였다.
 국권상실시대 이승만 박사, 김구선생, 이회영 일가 등의 독립투사들이 해외에서 투쟁하고 있을 때,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이론과 항일투쟁으로 조직을 확산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단되었을 때부터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활발히 활동하였다. 세계 사상의 조류에 따라 일정 때부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어서 지역에서의 신망도 높았다.  UN 감시 하에 선거 가능한 남한에서의 총선거 (5. 10 ) 가 확정되자 김일성과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통일의 꿈이 깨어지는 현실을 통탄하고 5.10선거 방해. 즉 대한민국 정부수립 반대의 전략을 수립한다. 남노당(공산당)조직이 잘 되어있고 투쟁적인 지도자 김달삼에게 이 책임이 맡겨져 제주도민에게 가장 슬픈 역사가 시작된다. 유격대장 김달삼은 단선(單選)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 전 도민을 궐기시켜 무장반격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준비 및 실행계획을 세우게 되며 1948년 4월3일 새벽 12개 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관과 5.10선거를 찬성하는 우익인사들을 살해함으로 시작된 4.3폭동사건은 수개월 만에 평정되었으나 완전 진압된 것은 아니었다.

북한으로 도주한 김달삼 사령관의 후임으로 유격대 사령관이 된 이 덕구는 그해 9월 15일 다시 대대적인 반정부 무력 투쟁에 돌입했고 그해 10월19일 육군 14연대의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 하게 꼬이고 악화된 것이다. 제주 4.3사건은 제주도에서만의 사건이 아니고 김일성의 남한적화통일 방침의 일환이었다. 이덕구는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극렬한 투쟁을 전개 하였고 여순반란사건으로 고무된 폭도들은 사기충천하여 전투는 더욱 치열해져 피는 피를 불렸던 것이다. 

그 해 1948년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전투 현장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억울한 죽음이 무수한데 순박하고 평화스럽던 제주도에서의 남로당이 이렇게 강세였던 것은 8.15해방 당시의 제주도 인구가 15만 명에 불과 하였지만 종전과 더불어 인구가 30만으로 불어났고 일본 중국 등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 중국 팔로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고 일본에서 사회주의사상에 물든 사람들도 있어 제주도는 이념의 혼란 상태에 점점 빠져갔던 것 것이다.
 작금의 시간은 사건일로 부터 60년도 넘었고 화해와 용서의 시대가 되었는데, 북한 독재 공산정권이 아직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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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4.3사태에서부터 6.25한국 전쟁, 아웅산 사태, 천안 함 폭침 사건 등의 완전한 종결은 대한민국의 통일이 완성되는 날에라야 가능할 것 같다.  잠자다가도 웃을 일인 6. 25북침 설이, 구 소련공산정권의 종말로 소련 공산정권의 모든 비밀이 드러난 것처럼, 언제인가는 꼭 있을 사필귀정인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공산당의 붕괴로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가지-스탈린, 김일성의 음모와 지령, 비밀들이 북한인권의 실상과 함께 폭로될 날이 꼭 돌아올 것이다.  그 날에는 이념에 의한 주장이 아니고 사실에 바탕을 둔 진실이 드러날 것이며, 허위와 왜곡에 의한 틀린 역사기록은 자연스럽게 마땅히 수정된 후에 허위와 거짓과 위선의 역사는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제주도의 평화는 대한민국이 평화로워야만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제주도에 평화가 왔고 제주도민의 삶이 풍요로워졌다. 대한민국의 국민 소득이 높아질수록 제주도민이 받을 혜택은 더욱 커진다. 제주도는 그 옛날의 어지럽던 탐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오늘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제주도일 때 그리고 대한민국 한반도로 밀려오는 모든 태풍을 제주도가 길목에 서서 방어 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켜 주는 것처럼 대한민국 국방의 방패가 되어 줄 때 그 진가는 더욱더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웅장한 한라산은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다. 한라산은 탐라국에서부터 현재의 제주도의 애환을 다 알고 있다.

한라산은 말한다.“제주도민이여, 평화를 소망하거든 대한민국의 안보를 걱정해라!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주는 불침, 항공모함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무역대국 대한민국의 첨병기지임을 자부하라”고.(KONAS)

林泉 金 顯石(수필가)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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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25 오후 3: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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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가리   

    평화공원 이라고 하는 곳에도 가보시지요 , 그곳은 의당 반란공원이라고 명해야지 , 노무현 정부의 역사관을 알만하지요</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1-01-24 오후 9: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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