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보 再論
“천안함 폭침을 북한소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는 측하고 보수가 과연 무엇을 ‘사귐의 파트너’로서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현실정치 지형(地形)상의 ‘진보’ 또는 ‘진보적’ 현상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적인 아이덴티티의 핵심을 보수측과 공유하려 하지 않으면서 ‘진보‘를 말하는 측면이 꽤 있다는 점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1951년에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말한 의회주의적 점진주의적 진보가 있고, 당시의 소비에트 모델(아시아 공산주의를 포함해서) 등의 극좌 노선이 있다. 극좌에는 물론 소비에트 모델과는 다른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 기타 유명 무명의 극단분파들이 있지만-.
1969년에 영국 이스트본(Eastbourn)에서 열린 사회민주주의자 대회(Socialist International)는 분명한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그 이전 1956년에도 네이토(NATO)를 지지하면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공유할 것이 없다(nothing in common)”는 입장을 천명한 적이 있다. 당시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가 제의한 통일전선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1972년에는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다. 독일, 오스트리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은 공산당과 협력하는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 사회당, 이탈리아 사회당, 일본 사회당, 핀랜드 사회민주당은 공산당과 행동을 일치할 것을 주장했다.
문제는 이것이다. 한국의 ‘진보’ 일부 또는 대세(大勢)가 1972년의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핀랜드 사회민주당들처럼 보수측을 제치고 김정일과 더불어 천안함 폭침의 ‘북한 소행’을 부정하는 하는 식의 ‘좌파 통일전선’에 목소리를 보태는 한, 그런 ‘진보’를 보수측이 흔쾌히 대안적 집권세력으로서 환영해 주기란 한반도 같은 상황에서는 좀처럼 내키지 않을 일일 것이다.
분배, 복지, 노동, 조세, 환경, 등 내 정책 분야에서는 ‘진보적’인 안(案)을 내놓는 것을 비록 찬성은 할 수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당장 적화(赤化)가 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적 상황에서 안보 분야에서까지 김정일과 말을 맞춘다는 것은 ‘보수측 감내(堪耐)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천안함 폭침을 북한소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는 측하고 보수가 과연 무엇을 ‘사귐의 파트너’로서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국내 경제정책을 달리한다 해도 보수 진보가 진정한 양 날개 짓을 할 수 있으려면 그래도 기본적인 한국적 정체성의 핵심에서는 서로 공유하는 바가 있어야 그게 가능하다. 한반도에서는 예컨대 천안함 문제에서 김정일과 말을 같이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수-진보사이에 ‘서로 공유할 것 없음’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이런 불통(不通)은 왜 있는 것인가? 한국 진보 내부에 NL 등 극좌 증후군(症候群)이 침윤(浸潤)해 고삐를 죄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 안에는 개인적 레벨에서 극좌친북이 아님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극좌친북에 대해 “갈라서자”는 말을 못하고 그 눈치를 보며 끌려가고 침묵하는 데 문제가 있다. 보수 야당으로서 탄생해서 성장한 정파 내부에까지 386들이 들어가 설치는 바람에 요즘 거기서 나오는 소리들이 영 이상해져 버렸다.
한국 정치지형이 더 다양성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온건 수렴(收斂)되는 모습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희망 자체는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천안함 폭침은 북한소행 아니다”라는 등, 한 쪽이 안보 분야에서까지 턱도 없는 괴담(怪談)을 마치 정론(正論)인양 우기는 현실에서 ‘서로 공유하는 핵심가치 속의 다양성’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이 의문이 해소되려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것이 극좌친북이 아님을 자임하는 진보가 극좌친북에 대해 분명하게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과연 될 수 있는 일일까? 글쎄다.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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