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
6·25를 겪은 분들은 떠나가고 있지만 그분들이 떠난다고 그때를 결코 잊을 수는 없으리라. 6ㆍ25 그리고 7월부터 시작된 수난의 90일 그때
소년의 나이는 14살이었고 중학교 1학년이었다. 1950년 6월 26일 저녁 소년은 마을 뒷산 산제사 터에 올라갔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모여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 터이기도 하다.
그날은 동네 마지막 모내기를 끝냈다. 한결 편한 마음으로 농사 뒷얘기를 하는 어른들 틈에 소년도 한몫 거들었다. 이때 갑자기 북쪽에서 천둥소리가 나면서 불빛이 일어나자 어른들은 기다리던 큰 비가 올 징조라며 모깃불을 끄고는 마을로 내려갔다.
다음 날 아침 우리 마을 뒷벌에는 포탄이 터졌고 소년도 생전 처음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소년이 사는 김포도 6월 28일 적군의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짧지 않은 90일간의 지루한 수난의 시대가 닥쳐온다. 7월을 잊을 수 없는 까닭! 소년은 지금까지 7월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학생소집이 7월 2~3일께였다. 머리를 빡빡 깎고 교도소에서 출옥한 남로당원들에 의해 유도되는 적군가의 함성 속에 남조선 해방, 김일성 스탈린 환영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평양에서 교편을 잡다 공산당이 싫어 남하한 역사 선생님의 인민재판이 시작됐고, 남조선 해방전선에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자는 결의가 그들에 의해 통과된다. 3학년 이상 전원 2학년 중 키가 큰 학생들까지 낙동강 전쟁터로 끌고 갔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 서울 수복이 끝난 한참 후에 김포에서 적군이 물러갔다. 그 이유는 인천상륙작전을 저지하던 상당수의 적군이 낮에 문수산에 잠복해 있다 밤에는 김포읍까지 진출해 활개쳤다. 밤에는 인민군기가 낮에는 태극기가 걸리는 15일간의 악순환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9·28수복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끌려간 학생들 300여 명 중 10여 명이 살아 돌아왔다. 나머지는 전사했든지 북으로 끌려갔으리라.
영화감독이 된 나는 그때에 본 실상을 KBS가 1989년 6·25 특선프로로 방영한 ‘비극은 없다(홍성유 원작)’에서 내가 겪은 6·25를 사실에 근접해 만들었다. 장터에서 생사람을 돌로 때려죽이는 인민재판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반동(경찰관 또는 자본가)들’은 낚싯바늘에 코를 끼워 끌고 다니는 잔혹한 형벌 등을 내가 본 대로 묘사했더니 시사회를 본 일부 언론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문제 장면을 잘라내고 방영하는 어처구니없는 수모도 당했다.
내가 본 6·25는 내가 제작을 맡은 이만희 감독의‘들국화는 피었는데’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증언’에서는 6·25의 시작과 낙동강 전선까지의 후퇴 그러나 인천상륙의 통쾌한 역전, 그 외에 다부동 전투를 소재로 한‘낙동강은 흐르는가?(임권택 감독·정진우 제작)’'흥남철수(고영남 감독·정진우 제작)’'8240 KLO(정진우 감독)’ 등의 6·25 소재 영화들은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박수를 받았다.
그때 14세의 소년은 지금 75세의 노인이 돼 있었다. 6·25를 직접 보고 겪은 분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고 있다. 그분들이 떠난다고 그때를 결코 잊을 수는 없으리라. 6ㆍ25 그리고 7월부터 시작된 수난의 90일 그때를 기억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국방은 오직 군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온 국민이 나서야 한다.(http://kookbang.dema.mil.kr/)
정진우(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ㆍ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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