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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7,27

Written by. 유명덕   입력 : 2011-07-27 오후 1: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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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명예롭지 않은 정전협정

 6·25 남침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7일 백선엽 제1군단장은 미 8군사령부로부터 전문 한 장을 접수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귀관은 정전에 관한 담판에 있어서 공산군 대표단과 협의할 대표 5명 중 1명으로 유엔군총사령관이 선발하였다. 첫 회의일정은 미정이다” 
 
 백선엽 1군단장은 전문을 접수하고 곧장 속초를 출발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대통령은“미군정시대도 미국은 공산당과 합작을 강요했다. 미군이 직접 공산군 측과 휴전협정을 하겠다는 것은 웃음을 살 일이다. 백 장군이 우리 정부의 뜻을 반영해야겠다. 미국사람들은 휴전을 하려고 하는데 중공군이 내려와 있는 마당에 휴전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통일이 목표야. 지금 휴전을 하자고 하는 것은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선엽장군은 이어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을 찾아갔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를 만나자 마자“유엔군 수석대표는 조이 제독이고 각 대표들은 수석대표를 보좌하는 것이다. 회담 진행 간 발언은 수석대표만 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은 들은 백선엽장군은 휴전회담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휴전이라는 이름 아래 오랫동안 분단될 것이며, 그동안 피 흘려 싸운 노력들이 의미 없이 끝나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대한민국이 그토록 원치 않았던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오전 11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문산리 동편 사과 밭에 있는‘평화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무려 575회의 길고 긴 담판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 조인이 이루어졌다. 

 7·27 정전협정! 이 날은 우리에게 있어 승전일이 아니며 기념일도 아니다. 정전협정은 참전 21개국 장병들의 희생의 의미를 퇴색시켰으며, 한반도의 통일을 막아 분단을 고착시켜버린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27 휴전협정일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힘(Power)을 가져야한다는 값진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즉 한반도 공산화를 그렇게 열망했던 공산군 측도 갈수록 우세해진 유엔군의 힘 앞에 어쩔 수 없이 휴전회담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북진통일의 열정을 꺽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도 공산군을 독자적인 힘으로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휴전회담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정전협정 의도와 과정이 우리 민족에게는 통일이라는 민족의 과업을 가로막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크지만, 우리는 이 날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깨닫고 이 땅에 이러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뛰어난 정치력이 안보를 지켜낸다

 7·27 정전협정에 있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국가안보는 수준 높은 정치력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애치슨라인 발표는 소련 등 공산측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게 빌미를 준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이것은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 실패이며 투르먼 행정부의 정치력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투르먼 행정부는 군사전략적으로도 실패했다. 당시 유엔군은 공산군보다 월등한 전력을 가졌고 맥아더 등 유엔군사령부 수뇌부와 이승만대통령은 이 기회에 다시 북진하여 적을 섬멸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투르먼은 공산군을 과대평가하고 소련을 지나치게 의식해 제한전쟁을 채택하였으며, 미국 사회에서 서서히 고개 들고 있었던 반전여론에 정치적인 부담감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투르먼은 중국의 경제적 봉쇄, 만주폭격, 대만군의 대륙공격 등으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고, 나아가 아시아 안보에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는 중국의 세력까지도 분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던 맥아더 원수를 전격 해임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전투 중에 부하 장수를 베어버린 행위와 같다. 당시 유엔군을 지휘했던 수뇌부들은 이러한 투르먼 행정부의 한국전쟁에 대한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그 중 한사람에 속한다. 휴전회담에 처음부터 간여했던 밴플리트 대장은 전역 후‘나의 양심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글을 ‘라이프’지에 기고하면서 이렇게 토로했다.“우리는 한국전쟁에 있어 크나큰 과오를 범했다.

 미국정부는 공산군 측과 협상에 응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장래에 무서운 암영을 던질 매우 위험한 모험이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공군의 세력을 아예 없애버리든지, 혹은 중공측이 진실한 평화를 희망하고 자유진영에 굴복하든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그들과의 협상을 시도한다는 것은 다만 우리의 희생자 수만을 증가시키는 원인을 만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이익도 없는 것이다”.... 이어 그는 당시 우세한 국면을 맞이했던 유엔군사령부와 그 휘하 군인들이 워싱턴에서 행해지고 있는 정책에 대해 자신에게 항의하는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군님, 우리는 무슨 이유로 억제(전쟁확대를 억제하라는 투르먼 대통령의 전쟁 제한정책)를 당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곤란에 직면해 가면서도 이것을 극복하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이것은 통일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한 장병들이 정치적 이해와 판단에 의해 골치 아픈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자신들의 통수권자와 정치인들을 향한 불만이었다.

 우리는 6·25전쟁에 대한 투르먼 행정부와 정치인들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국가안보는 정치인들의 뛰어난 군사전략과 정치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대남심리전을 극도로 경계해야한다

 최초의 휴전회담이 이루어졌던 회담장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문산리 인근의 한 곳이었다. 회담장소를 왜 적 지역으로 정했을까? 물론 여기에는 공산군 측의 주도면밀한 계획, 즉 상대를 자신의 점령지역으로 들어오게  하여 회담시작부터 심리적으로 주도권을 잡아보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첫 회담에 참여했던 백선엽 장군의 기록에서도 잘 나나타고 있다. ....“ 우리는 헬리콥터 편으로 회담장을 향했다. 대표 일행들은 출발 전 손거울 하나씩을 받았다.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거울로 구조 항공기에 신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이 글은 당시 대표단들의 신변보장이 완전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군 측 대표단의 심리상태는 어느 정도 위축 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공산군의 심리전은 회담이 진행되면서 더욱 노골화 되었다. 8월 15일 개성에 있었던 25차 회의장 입구에는“외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라. 조선의 문제는 조선인의 손으로 해결하자”는 글씨가 큼직하게 걸려있었다. 이 뿐 아니다. 공산군 측 대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한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해야 한다는 말을 지루하게 되풀이 했다.

 특히 북한군 정찰국장이었던 이상조(李尙朝)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선엽 장군에게“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은 상가집의 개보다 못하다”는 빨간색 글을 써 보이며 자극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심리전 목표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철수였으며 그 명분은 한민족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산군은 회담 벽두부터 심리전 공세를 적극적으로 폈으며, 심리전 주역들은 주로 정치장교들이었다. 이들 정치장교들은 전형적인 직업군인들이었던 유엔군 측 대표들을 회담 내내  심리전을 펴 피곤하게 만들었다. 휴전회담 시작부터 공산군 측이 들고 나왔던‘남한은 미제국주의 하수인’‘한민쪽끼리’,‘외세 배격’‘미군 철수’는 5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북한이 단골 메뉴로 사용하고 있는 대남심리전의 대표적인 구호들이다. 

 최근 북한은 남북접촉사실을 전격적으로 공개하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것 역시 과거 휴전회담에서 그래왔듯이 대남심리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대한민국정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추락시키고, 현 정부와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악화시켜 한반도에서의 긴장 조성이 대한민국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워 남남갈등을 부채질하는 한편, 내년 선거정국을 최대한 이용하여 대남투쟁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7·27정전협정은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폭력이 될 수 있는 대남심리전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하도록 요구하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정전협정은 전투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뜻한다. 정전협정에는 전투행위를 잠시 멈추는 것일 뿐 전투행위의 재개와 이에 대한 책임문제 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북한은 휴전협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들은 휴전협정을 어디까지나 잠시 전쟁을 멈추는 것일 뿐 언제라도 전쟁을 재개하여 그토록 원했던 남한지역에 주체사상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끓임 없이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한다. 휴전 후 북한이 저지른 42만 건 이상의 대남도발은 정전협정을 우습게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하시라도 정전협정을 깨뜨릴 결정적인 구실을 찾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특히 연평도 포격사건은 북한이 전쟁으로 가기위해 저지른 초강경 도발이다. 아마도 북한은 연평도 공격을 통해서 대한민국 군의 대응능력과 국가안보시스템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이와 반면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휴전을 종전으로 착각하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 많은 국민들은 이 땅에서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전쟁을 벌이고야 말겠다는 경고메시지를 지금도 계속 보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심지어 정치적으로 왜곡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의 범죄 사실을 규명하고 그 책임을 물어 국가안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태도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심지어 적으로부터 영토가 공격당해 불바다가 되고 주민들은 겁에 질려 피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이것은 전쟁이 아니야!”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북한을 규탄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부와 군에게 북한을 자극하지 말라고 촉구하기 일쑤이다.

 휴전협정이 종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북한공산주의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최종목표는 7·27 정전협정의 판을 결정적인 시기를 선택해서 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6·25 새벽에 일어난 일처럼 기습적인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전협정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영원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새로운 전쟁이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는 상태, 즉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손에 쥐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정전협정일이 다가온다. 7·27은 기억하고 싶지 않는 날, 잊혀버린 날이 되어가지만 우리는 이 날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한다. 국가안보를 제힘으로 지킬 힘을 갖지 못해 국토가 분단된 일, 힘의 논리에 의해 휴전을 강요당하고 북진통일을 놓쳐버린 일, 길고긴 휴전회담장에서 보여준 공산집단의 이글거리는 적개심,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위대한 희생정신, 그리고 적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그 중심에 여전히 서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말이다.(konas)
* 이 칼럼은 월간 자유지에도 게재됨.       

유명덕(국방정신문화칼럼니스트)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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