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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19년의 의의와 평가-②

수교 19년 한중관계의 전개

Written by. 박승준   입력 : 2011-08-28 오전 7: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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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수교 19년 한중관계의 전개

 1. 장쩌민 시기 : 1992~2001년
 수교 2년 전인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김일성과 한중관계에 관해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장쩌민은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태의 와중에서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된 데 이어 1989년 9월 덩샤오핑으로부터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도 승계해서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첫 방문지로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장쩌민은 김일성에게 한국이 노태우 대통령 당선 이후 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덩샤오핑 동지에게 편지를 보내 한중관계의 개선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가 하면, 중국과 한국의 무역액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데다가, 한국은 천안문 사태 관련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제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자세를 취해, 중국이 한국과 무역대표처를 개설하는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흐름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중국이 남조선과 무역대표처 설립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를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1차 한중수교 예비회담이 열리기 1개월 전인 1992년 4월 중국은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김일성 80회 생일 축하차 평양을 방문한 길에 중국이 한국과의 수교를 고려중이라는 통보를 김일성에게 했다. 당시 김일성은 “현재 조선반도는 미묘한 시기이므로, 중국이 중한관계와 조미관계를 고려해서 협조해 달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이 한중수교 방침을 북한에 통보한 것은 1992년 7월15일 장쩌민의 지시를 받은 첸치천 외교부장이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이뤄졌다. 첸치천 외교부장의 이날 방문은 전례 없는 단 하루만의 방문이었고, 첸치천은 평양 순안공항에서 헬기를 타고 김일성의 별장으로 날아가 오전11시에 중국의 한중수교 방침을 통보하고, 다시 헬기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으로 돌아온 다음 바로 베이징으로 귀환해서 오후 5시에 장쩌민총서기에게 통보 임무 완수를 보고함으로써 종결됐다고 첸치천이 자신의 회고록 『외교십기』에 기록했다. 첸치천이 이 기록은 한중수교를 둘러싸고 불편했던 당시의 중북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은 첸치천의 통보를 받고 “우리는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며, 우리는 일체의 곤란을 극복하고 우리의 자주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해나갈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이뤄진 후 중국과 북한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처음으로 불편한 관계가 됐다. 중국외교부의 공식 웹 페이지의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1953년 한국전 휴전 이후 연례행사처럼 이어져오던 북한 지도자들의 중국 방문이 1991년 10월 김일성(주석)의 방문 이래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의 방문이 이뤄질 때까지 8년간 단절되어 있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 기간에 중국측에서는 후진타오(胡锦uc0涛)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1993년 7월에, 뤄간(罗?) 국무위원이 1996년 7월에 방문했을 뿐 최고지도자급 중국 인사의 평양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기간에 한국에서는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비롯해서, 1994년 김영삼 대통령, 1995년 이홍구 총리와 황낙주 국회의장,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중이 이뤄졌고, 중국에서는 1994년 리펑(李鵬) 총리, 1995년 차오스(喬石)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장쩌민 국가주석, 1998년 후진타오 국가부주석, 1999년 리루이환(李瑞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최고지도자급 인사들의 방한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기간 중국의 한반도 외교는 서울과는 가깝고, 평양과는 소원한 흐름을 보여주었다.

 이 기간 북중 관계의 냉각은 북한의 일방적인 중국 측 정전위원회 대표단 철수 요구에서도 나타났다. 북한은 1994년 8월 외교부 부부장 송호경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해서 정전위원회 중국대표단(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정전위원회 대표단 철수는 한반도에서 스스로 자신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며, 중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안정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평화체제가 건립되기 전에는 휴전협정은 여전히 유효하며, 관련 당사국들은 이를 존수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 기간에 소련의 붕괴로 북한의 유일한 지원국이 된 중국은 북중 경제관계를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현금결제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북한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고, 1995년부터는 홍수와 가뭄 피해가 겹치면서 북한 경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장쩌민 시대의 북중관계는 한중수교의 여파로 1948년북한정권 수립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최악의 관계로 개괄해볼 수 있다.

 2. 후진타오 시기 : 2002년 이후

 후진타오는 1999년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덩샤오핑이 지명한 장쩌민의 후계자로 내정된 데 이어, 2002년에는 당 중앙총서기, 2003년에는 국가주석이 됨으로써 중국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고, 후진타오의 등장과 함께 중국은 1992년의 한중수교로 인한 북중관계의 냉각기에서 벗어나서 2000년부터 시작된 회복기를 거쳐 2010년 이후에는 정치 외교적으로는 친북반한의 과거로 회귀하는 형세를 보여주었다.

 후진타오는 북중관계가 냉각기이던 1993년 7월 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북중관계의 본격적인 회복은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 자격으로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잇달아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이뤄지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2004년과 2006년 중국을 방문한 데 이어 2010년 5월과 8월, 그리고 2011년 5월 잇달아 세 차례 중국을 조선노동당 총비서 자격으로 방문함으로써 북중관계가 1990년대의 한중수교의 여파로 냉각돼있던 국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진입했음을 국제사회에 과시했다.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은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열리기 시작한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한과 미, 중, 일, 러 6자회담’의 의장국으로서 남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과는 경제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실질적인 관계의 강화를 추진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북한이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핵실험을 실시한 데 대해서도 이렇다 할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북중관계를 관리하는 자세를 취했다. 중국은 특히 2010년 3월 서해에서 발생한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침몰 이후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서해상의 한미 합동 군사훈련과 유엔 안보리를 통한 북한 제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북한 옹호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한중관계를 냉각시키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북한과의 강한 유대를 과시하고, 한미 동맹의 대척점에 서서 한반도를 둘러싼 신 냉전(New Cold War)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 시기에도 장쩌민 시기와 마찬가지로 한중 경제교류의 규모는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1992년 82억 달러 규모에서 2010년 양국 교역액은 2071억7000만 달러를 기록해서,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자, 최대의 수출시장, 수입대상국이 됐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액(FDI)도 476억7000만 달러로 중국은 한국의 최대 투자대상국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 양국의 정부 간 관계는 중국 외교부의 표현에 따르면, 순조로운 발전을 계속해서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중으로 ‘1세기를 향한 전면적 동반자 관계’임을 선언했고, 2000년에는 주룽지(朱鏞基)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전면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한 뒤, 다시 2008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방중으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임을 선언했다. 한중관계를 규정한 이 같은 개념들은 그러나 실질 외교관계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상회담을 계기로한 선언적 의미를 넘어선 양국 관계 변화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3. 중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

1) 시진핑의 한반도 정책 전망

 중국공산당은 2012년 가을의 전국대표대회(全大・전당대회)를 통해 현 후진타오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부를 시진핑(習近平) 현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체제로 교체하는 준비를 진행 중이다. 새로운 중국 지도부의 핵심이 될 예정인 시진핑은 2010년 10월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 개입 60주년을 기념하는 인민대회당 좌담회에 나와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된 한반도 정책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시진핑은 “평화를 애호하는 것이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이라고 말하고 “60년 전에 발생한 그 전쟁(한국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중국 인민들에게 강요한 전쟁이었다”고 말해 1950년 한국전 발발 당시의 중국 지도부 입장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1992년의 한중수교 예비회담 과정에서 한국이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 국민들이 입은 큰 피해와 희생을 감안하여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한다는 뜻에서 중국 측의 적절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으나, 중국 대표들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견해는 6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시진핑은 “조선반도는 중국과 산수가 이어져 있으며,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중국은 이 문제에 관한 기본입장과 정책적 주장은 일관되게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자는 것이며, 대화와 담판 등 외교적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반도 문제의 최종적이고 철저한 해결을 실현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 지도부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경제발전)을 위해”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필요로 하는 덩샤오핑 이래의 한반도 정책을 유지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2) 중국의 주변외교 새 전략
 관영 신화통신은 2011년 7월22일 ‘중국의 주변외교 신전략’이라는 논평을 타전했다. 중국 관영 언론의 성격상 신화통신의 이 논평은 앞으로 중국의 주변국 외교전략의 변화를 예고해주는 내용인 것으로 판단된다. 논평은 중국의 주변 환경에 앞으로 10년 동안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변화가 나타날 것이며, 이에 대해 중국은 각각의 변화에 대해 새로운 주변외교 전략을 구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첫째, 중국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함에 따라 미국이 다시 아시아를 중시해서 아시아로 다시 되돌아오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기제(機制・체제)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2009년 7월 미국정부는 동남아 우호협력 조약에 서명하는 한편, 2010년 10월 오바마 정부는 동아시아정상회의에 가입했다. 둘째, 2010년 9월에는 일본과 조어도(釣魚島) 분쟁을 빚었고, 2011년 들어서는 베트남, 필리핀 등과 남중국해에서 영해 분규를 빚었으며, 앞으로 10년간 영토와 영해, 경제수역을 둘러싼 주변국과의 분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주변지역에서 중대하면서도 돌발적인 사건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북한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동북아에 핵무기가 확산되고, 군비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다. 미얀마, 파키스탄, 중동지역의 변화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신화통신은 이와 같은 중국 주변의 새로운 정세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첫째, 미국이 아시아로 되돌아오는 정책을 추구하는 변화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과 미국의 상호 경제의존도가 깊어져 가는 배경에서 중국은 ‘제도적인 균형전략’ 다시말해 “미국이 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실제이익을 인정하고 미국의이익에 손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중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한편, 미국이 중국의 ‘화평굴기(和平崛?)’를 인정하도록 하는 전략목표를 갖도록 한다. 중국과 미국이 공존, 공영, 공생 하는 전략을 추구한다.

 둘째, 주변국과의 영토, 영해, 경제수역 분쟁의 심화에 대해서는 2011년 4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밝힌 “우호적인 담판을 통해 평화적으로 주변국과의 권익분쟁을 해결한다”는 원칙을 적용해서 해결한다.

 셋째, 주변국에서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의 도전에 대해서는, 남북한 관련 문제의 경우 남북한 양국이 위기처리시스템을 갖추도록 유도한다. 위기처리 시스템을 갖추어 어느 일방이 오판을 하거나, 과도한 반응을 하지 않도록 하며, 6자회담을 통해 북한핵문제를 담판을 통해 해결토록 한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주변국가 내부의 정국 변화에 의해 일어날 급변사태에 대해서는, ‘성숙한 민주국가’에서 정국의 급변이 일어날 경우 그 변화의 충격이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며, ‘과도기형 국가’에서 정국 급변사태가 일어날 경우에는 해당국가의 대중국 정책에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문제국가’에서 정국혼란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혼란이 중국의 지정학적인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다.

 한중관계는 이 세 가지 변화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 첫째의 변화에서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인정하고 한국과의 관계에서 공존공영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두 번째 변화의 경우, 한중간의 영토분쟁이나 영해분쟁에 대해서는 대화와 담판을 통해 해결할 전망이며, 세 번째 북한 핵문제로 인한 돌발사건에 대비하기 위해서 중국은 현재의 6자회담 이외에 남북한 간의 위기대응체제 구축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6자회담은여전히 중국에게 유효한 한반도 정책 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하겠다.(konas)

박승준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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