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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19년의 의의와 평가-③

Written by. 박승준   입력 : 2011-08-28 오전 7: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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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덩샤오핑 구상의 현실화와 북방정책의 표류

1. 덩샤오핑 구상의 현실화

 첸치천이 『외교십기』에 기록한 한중수교에 관한 덩샤오핑의 구상에 따르면, 한중수교는 다섯 가지의 유리한 점을 중국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는 계산이 바탕에 깔린 전략적 판단이었다. 첫째, 한중수교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고, 둘째,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 단절을 가져와 대만을 고립시켜 중국의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며, 셋째, 한중수교는 중국의 대미(對美), 대일(對日) 대(對)동남아 외교는 물론, 넷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의 유지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것이 덩샤오핑 구상의 핵심 내용이었다.

 한국과 수교를 결정한 덩샤오핑 구상에 대해 Scott Snyder는 첸치천이 ‘일석사조(一石四鳥)’라는 말로 설명했으며, 한중수교는 ①대만의 외교적 고립 심화 ②한국과의 경제협력 강화 ③북한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 요구 차단 ④ 수퍼301조를 통한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제 압력에 대한 완화 등의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평가했다. Snyder는 중국이 한국과의 경제교류가 가져올 잠재적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교를 결정했으며, 중국의 그런 판단은중국이 동아시아 주변국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필요한 전례 없는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중국은 덩샤오핑 구상에 따른 한중수교로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북한 일변도 외교에서 탈피해서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는 ‘­두 개의 한국(Two Koreas)' 정책으로 전환함으로써 경제발전의 동력을 확보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보했고, 한중 수교 19년이 흐른 시점에 중국의 경제력은 GDP 규모로 미국에 이어 세계2위, 외환보유고 세계1위의 국가가 됨으로써 거꾸로 남북한 모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까지 확보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92년의 한중수교 이후 19년이 흐르는 동안 한중수교로 인한 한・대만 관계의 단절과 함께 일본・한국・대만・동남아로 연결되는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방어적(defensive), 또는 저항적(Anti-China) 라인 대신 정치・경제적으로 활발한 대일(對日), 대한(對韓), 대(對)동남아 관계 구축에 성공함으로써 한중수교를 결정한 덩샤오핑 구상은 적중한 전략이라는 평가를 해볼 수 있다.

 덩샤오핑 구상에 따른 한중수교는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에서도 북한일변도 외교에서 남북한과 동시 수교를 통한 등거리 외교를 기본으로 하는 ‘두 개의 한국’정책에서도 6자회담의 의장국으로서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고 남북한에게 동시에 영향력을 갖는 위상을 확보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수교 직후 8년 정도 냉각되기는 했으나, 2000년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오히려 급속히 발전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한에 대해 이전보다 더 확대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고 하겠다.

2. 북방정책의 표류

 1982년의 한중수교를 가능하게 한 중국 측의 전략적 선택이 덩샤오핑 구상이었다고 한다면, 한국 측의 전략적 선택은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또는 북방외교였다.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한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북방정책을 3단계로 나눠 추진한다는 구상에 따라 외교행정 당국에 한중수교를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북방정책의 제1단계는 여건을 조성하는 단계로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를 상정하고 추진하는 단계이고, 제2단계는 남북한 통일로, 1991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한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기본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이 그 성과물이었다. 제3단계는 한국인들의 생활권과 문화권을 연변, 연해주 등으로 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구상이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북방정책의 기본 전략은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궁극적인 목표인 북한과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 소련 동유럽 국가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수교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한중수교 19년이 흐른 시점에서 북방정책을 평가해보면, 제1단계인 중국, 소련,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궁극적인 목표인 남북한 통일은 북방정책의 과정에서 채택한 한중수교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으로 오히려 멀어지고, 남북통일보다는 남북분단의 고착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한중수교를 통해 한반도 통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수교 교섭과정에서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한국(Two Koreas)'을 받아들인 것은 전략상의 착오였으며, 중국은 한중수교를 통해 한국으로부터 ‘하나의 중국’을 인정받아 한・대만 관계의 단절을 이룬 뒤에, 수교 과정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던 북한을 한국카드로 압박해서 1991년 8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하게 함으로써, 중국어 국명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는 국제법상 완전히 별개인 두 개의 국가를 한반도에 존재하게 하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관련 2003년에 출판된 첸치천의 회고록 『외교십기』에 따르면, 1991년 5월 평양을 방문한 리펑(李鵬) 총리는 주석 김일성과 만나 그해 8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가입신청을 할 경우 중국으로서는 더 이상 반대하기 곤란하다는 견해를 전하면서, 더구나 한국이 북한보다 먼저 유엔에 가입할 경우 북한이 나중에 가입하려해도 가입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강하게 권유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중국에 협조하겠다”는 말만 했으나, 직후 노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조선은 북남조선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1991년 8월 유엔총회 때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성사됐다. 중국으로서는 1992년 8월 한국과의 수교에 앞서, 한중수교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는 국제법적으로 명백히 별개의 독립주권국가인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한국정부가 정책으로서 추진한 결과이기도 하며, 중국은 한반도에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면밀한 계산 끝에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함으로써 한반도를 두 개의 한국으로 분리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북방정책은 그 중간단계인 한중수교와 한소수교를 이루는 데는 성공했으나 궁극적인 목표인 남북한 통일로 다가간다는 제2단계의 목표는 정책 선택의 실패로 오히려 부정적인 귀결을 보게 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Ⅴ. 결론

 덩샤오핑의 구상과 노태우의 북방정책에 따라 이뤄진 한중수교는 수교 19년이 흐른 시점에서 보면 덩샤오핑 구상의 현실화와 북방정책의 표류라는 결과로 연결된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한중수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중국이 추진함으로써 성사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뿐만 아니라 수교협상과정에서 한국 측이 요구한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에 대한 해명, 또는 유감 표명 역시 중국 측의 의도대로 수교 공동성명에 담지 못했으며, 양국 수도에 둘 대사관 건물과 부지에 대한 협상 역시 중국 측의 의도에 따르는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수교 19년이 흐른 현재에 와서 평가해보면 당시의 수교 교섭이 대부분 중국 측의 성공과 한국 측의 잘못된 선택으로 귀결 지어진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수교 교섭 당시 외무장관이던 이상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우리 국민에게 큰 피해와 희생을 준 일은 수교 교섭과정에서 제기하여 서로의 입장을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였으므로, 우리 측은 예비회담에서 이문제를 거론하여 예비회담 기록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공동성명에는 중국 측의 반대로 명시하지 못하고, 예비회담 기록에 남겨둔 정도도 성과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옥의 이 같은 견해는 2010년 10월25일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 50주년 기념일에 시진핑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좌담회 연설을 통해 한국전참전에 대한 중국의 입장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음을 내외에 공식 천명함으로써 우리의 수교 교섭과정에 예비회담 기록을 남기는 정도로 그친 선택은 잘못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한국’정책의 수용, 한국전 참전에 대한 중국 측 유감 표명의 명시적 기록화, 대사관 부지와 건물에 대한 불리한 교섭 결과 등은 당시 한국 측의 수교 교섭과정이 제대로 된 검토와 준비 과정 없이 진행된 결과라는 평가도 아울러 내릴 수 있다. 이와 관련 이상옥은 “제6공화국 발족과 더불어 본격화된 북방외교가 노태우 대통령 임기 중에 대단원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데 정부 내 공통된 인식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1992년 12월의 대통령 선거, 1993년의 신정부 출범 등 국내 정치 일정을 감안해서라도 1992년 중 가능한 한 조속히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실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국가의 외교목표는 국내 정치일정과 분리되어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이상옥 장관의 판단은 국내정치 일정에 맞추어 조속히 달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85년부터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 의해 추진된 한중수교 교섭과정에서 충분한 외교적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한중수교가 이루진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 1992년의 수교 교섭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권병현 전 주중한국대사는 “비록 짧은 기간에 극소수의 인원으로 교섭에 나서야 했던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를 보다 철저하게 해서 교섭을 더 잘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하며,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 보다 명확한 해명을 얻어내지 못 한 점을 아직도 아쉽게 생각하고, 또 대한제국 때부터 베이징에 있던 우리의 재산에 관한 보다 정확한 조사를 못한 점도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남겼다.(konas)

박승준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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