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戰史上 최악의 정보 誤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개입에 관한 수많은 事前 事後 정보가 들어왔음에도 그는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개입 규모를 축소하였다.
세계戰史上 가장 큰 정보 誤判은, 맥아더 장군이 北進中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중공군 개입에 관한 수많은 事前 事後 정보가 들어왔음에도 그는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개입 규모를 축소하였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하면 중국 본토로 擴戰하여 중국을 수복할 것이고,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이 이뤄진다"는 생각을 갖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였던 것 같다. 맥아더의 誤判은 1.4 후퇴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지는데, 역사는 이 誤判이 韓美동맹 체제를 낳음으로써 오히려 한국을 살렸다고 해석할지 모른다.
1950년 10월24일 유엔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서부전선에서 北進의 主力은 美 8군의 제1군단이었고 선봉부대는 白善燁 준장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었다. 1사단은 6·25 기습 때도 선전했고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평양 돌입에서는 先着(선착)부대가 되었다. 白 사단장은 청천강을 넘어 금광으로 유명한 雲山(운산)으로 진입하면서부터 불길한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기온은 급강하하여 아직 하복을 입고 있던 장병들은 추위를 타기 시작했다.
지형도 바뀌어 날카로운 봉우리와 깊은 계곡 속으로 진격부대는 빨려들기 시작했다. 운산은 꽤 큰 도시였는데 人跡(인적)이 보이질 않았다.
10월 25일 중공군은 드디어 매복지에서 뛰쳐나와 전력이 미군에 비해 약한 국군 선봉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 1사단과 2군단(군단장 유재흥) 소속 3개 사단이 표적이 되었다. 이들은 배후가 차단되고 옆구리를 찔리고 정면을 돌파당했다.
배후와 측면을 치는 戰域迂廻(전역우회), 인해전술에 의한 정면돌파, 신속한 산중 행군과 야간기습을 배합한 중공군은 품안에 안겨든 국군을 ‘독 안에 든 쥐’처럼 두들기기 시작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첫날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신문했다. 포로의 진술이 하도 충격적이라 백 사단장은 1군단장 밀번 소장을 불러 그가 직접 포로를 신문하도록 했다.
“어디 출생인가.”
“중국 남쪽입니다.”
“어느 부대인가.”
“제39군입니다.”
“전에도 전투해본 적이 있는가.”
“海南島(해남도)에서 싸웠습니다.”
“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인가.”
“아닙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
밀번 소장은 중공군 포로에 대한 신문 내용을 즉시 맥아더 사령부의 윌로비 정보참모부장에게 보고했다.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은 국군 1사단은 워커 8군 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40일 만에 처음인 후퇴명령이었다. 1사단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하여 미 제1기병사단의 8연대가 중공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최초의 美·中 무력충돌이었다.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8연대를 공격한 중공군은 조랑말에다가 공용화기와 탄약을 싣고 다닐 뿐 자동차나 戰車는 한 대도 없었다. 하룻밤의 산악행군으로 백 리 길을 간단하게 돌파하는 중공군은 산불을 내어 연기와 화염으로 자신들을 은폐하기도 했다. 미 8연대 3대대는 중공군에 포위되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호바트 게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5연대를 보내 3대대를 구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5연대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게이 사단장은 더 오래 구조작전을 끌다가는 5연대가 전멸할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3대대를 포기하라고 지시했다. 미군 전사상 포위된 부대의 구조를 포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3대대 장병 800명 가운데 600명이 戰死하거나 실종되었다. 전차 17대와 105밀리 포 13문과 함께. 백선엽은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려다가 전멸한 미군 3대대 장병들에 대한 기억은 죽을 때까지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서 중공군의 전신인 팔로군과 싸워본 적이 있는 丁一權 총장은 워커 美 8군사령관과 참모들이 중공군의 출현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워커는 “아직까지는 정규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인민군에 들어 있는 팔로군 출신들과 구별이 잘 안 된다”고 말하는가 하면 “한국군 지휘관들은 패퇴의 책임을 피하려고 중공군 병력을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李承晩 대통령도 丁 총장의 보고를 받고서 태평스럽게 말했다.
“역시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
老(노)대통령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라고 했다. 맥아더가 2주 전에 보낸 편지대로 원폭을 써서라도 중공군을 격멸하고 만주를 공격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동해안에서는 수도사단 18연대 1대대(대대장 이병형 중령)가 北進 대열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함흥 북쪽 부전고원에 올라갔을 때 1대대는 중공군 취사병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해질 무렵에 도착할 중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李秉衡 대대장은 중공군 중대가 접근해 올 길목 주변에 중대 규모의 병력을 매복시켰다.
<그들의 말소리는 수백m에서도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면서 오니 우리도 다소 긴장이 풀리는 듯싶었다. 어둠 속에서 중공군들은 4열 종대로 무언가 지껄이면서 내 앞을 지나서 종대의 선두가 隘路(애로)의 끝에 도달했다. 나는 신호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300정의 소총과 수십 정의 자동화기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류탄과 조명탄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사거리 30m, 죽은 자, 부상자, 엎드린 자의 구별 없이 몽땅 다 쓰러지고 말았다. 오랜 시간 긴장하고 기다린 것에 비하여 너무나 반응이 없어서 무언지 모르게 허탈감마저 느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대병력이 출현하자 일단 이를 과소평가하려고 했다. 그는 워싱턴에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단순한 지원병일 가능성, 둘째는 인민군에 대한 보급 지원 부대일 가능성, 세 번째는 압록강 남쪽에 완충지대를 형성하려고 하는 병력일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 정예사단(한국군 1사단)이 반신불수 상태에서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국군 6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맥아더는 게릴라의 출현 정도로 평가하고 있었다.
반면 중공군은 미군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들은 제1차 충돌 직후의 평가서에서 ‘미군은 화력은 뛰어나지만 보병의 경우, 겁이 많고 야간 작전을 두려워하며 보급선이 차단되면 사기가 떨어지고 배후를 치면 후퇴한다’고 했다.
중공군은 미1군단(국군1사단 포함)의 오른쪽 戰線을 맡은 2군단의 6, 8사단도 공격하였다. 군단장 劉載興 소장은 육군참모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戰勢가 급해지자 다시 군단장으로 복귀, 후퇴작전을 지휘하였다.
10월28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軍團 사령부를 방문, "맥아더 원수로부터 총추격 명령을 받고 왔다. 지체없이 압록강에 도달하라!"고 명령하였다. 기가 막힌 劉 장군이 "정면엔 중공군 4개 사단이 있다. 지금은 태세를 정비할 단계이다"고 반발하였다.
워커 중장은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문의하였다. 원수는 '빨리 진격하라'고 질타하였다. 내가 다시 청천강에서 부대를 정비해야 한다고 再건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수는 중공군의 개입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리이겠지만 가 주었으면 한다. 책임은 내가 진다"고 간청했다.
워커 8군 사령관이 北進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은 11월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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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神話: 웨이크섬 회담의 俗說과 진실
맥아더와 트루먼은 늦게 내리는 경쟁을 한 적이 없다.
趙甲濟
며칠 전 한 著名(저명)한 학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유명한 웨이크 섬 회담 때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이 따로 탄 비행기가 거의 동시에 섬 상공에 도착, 선회하면서 서로 늦게 내리는 경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일부러 뒤에 착륙,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마중하게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난 트루먼 대통령이 機上에서 맥아더의 先着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그건 神話이다. 맥아더 장군은 전날에 이미 웨이크 섬에 와 있었다"고 했더니 그 학자는 "트루먼이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한 책이 있다"고 했다.
밀러라는 기자출신이 트루먼과 나눈 대화를 死後에 출판한 책이 있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트루먼이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밀러가 윤색한 것인지는 애매하다. 분명한 것은 사실이 아니란 점이다.
1950년 10월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에서 역사적인 회담이 이뤄진 것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토의하기 위함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접하고 걱정이 되었다. 10월2일, 중국 周恩來 총리는 밤중에 北京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르를 불러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가만 있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인도 대사의 말을 들은 미국 관리들은 그가 평소 親中的인 사람인 점을 감안, 이 정보를 무시하였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불안하였다. 직접 맥아더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도쿄에 주재하던 맥아더는 北進을 지휘하는 사령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불러낸다고 불평하면서 하루 전에 웨이크섬에 갔다. 트루먼 일행을 태운 전용기는 호놀룰루에서 이륙, 15일 새벽 6시30분에 웨이크섬에 도착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30분 전에 비행장에 나와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元老 외교관 해리만은 다른 비행기로 먼저 도착, 맥아더와 함께 서 있었다. 해리만은 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최종적으로 허가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작전이 실패하였더라면 대통령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고 귀띔해주었다.
트루먼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맥아더는 몇 가지 불손한 행동을 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正裝(정장)인데, 맥아더는 작업복 차림이었고 윗옷의 단추를 다 채우지 않았다. 모자도 낡은 것이었다. 맥아더는 육군 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 육군장관은 서열상 모든 육군장병의 우두머리였다. 더 놀라운 것은 맥아더가 최고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 팔을 잡고 악수를 하였을 뿐이다. 트루먼은 그런 결례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였다.
웨이크 섬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의 개입은 없다. 있어도 소규모일 것이다. 이는 쉽게 섬멸될 것이다. 한국전은 사실상 끝났다"고 斷言하였다. 그 순간 毛澤東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을 압록강이 보이는 만주에 집결시켜놓고 있었다. 사흘 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지역으로 들어온다.
트루먼은 웨이크섬 회담 이후에도 맥아더로부터 여러 차례 抗命사태를 겪으면서 골치를 썩이다가 1951년 4월 해임하기에 이른다. 트루먼은 당당하고 솔직하고 短氣였다. 이런 사람이 맥아더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래 참은 것은 그 또한 맥아더의 神話에 영향을 받아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서 神話的 인물이 되어버리면 과장과 美化에 둘러싸이게 되고 상황을 오판하게 된다. 한국은 맥아더 神話로부터 得도 보고 손해도 보았다.
(http://www.chogabje.com)
조갑제(조갑제 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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