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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청년지식인포럼 story K 대한민국 청년 2040 세대의 네가지 오해’ 시리즈 첫 강좌

Written by. 이영훈   입력 : 2011-10-02 오전 9: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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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지식인포럼 story K 월례강좌 ‘대한민국 청년 2040 세대의 네가지 오해’ 시리즈 중 첫 번째 강좌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층 대강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강좌에서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주제로 2시간여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다음은 강연 전문임

 대한민국이 앞으로 30년 후, 50년 후에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제기할 때 낙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가 어떤 ‘이념적 정체성’을 갖는지에 분열이 증폭되고 있다. 초중고 교육에서부터 이념적 정체성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런 나라는 길게 가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개인조차 존재론적 갈등에서 고통을 받는데 심지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정치적 집합인 국가가 자기의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의 장래는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절실하게 생각해야 할 정치적, 사회적, 국민적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1. 대한민국 제1회 독립기념일 포스터, 언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1946년 8월 15일이라고 답한다. 육관박물관에 <광복 1주년을 맞아 1946년 8월 15일에 만든 포스터>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답은 신문에 있다. 1949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조간신문에는 ‘독립 1주년 기념식이 오늘 열릴 예정이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다음 날 기사에는 어제 열린 독립 1주년 기념식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 1주년을 맞아 두 달 전 ‘기념식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포스터, 구호, 슬로건 공모전을 개최했다.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을 다수의 국민들이 모르고 있다. 보통 많은 나라들이 독립 기념일, 국경 기념일이 있지만 우리는 없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을 기억할 국민적 축제나 의례가 없다. 그러나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지난 60년간 잊어버린 것이다.

 1949년 8월 15일은 제1주년 독립기념일이다. 세 달 전 국회에 관련 법률이 제정됐다. 당초 원안은 독립기념일이었지만 명칭이 바뀌어 광복절로 제정됐다. 1950년 8월 15일 임시수도 대구에서 제2회 광복절을 기념하는 식이 열렸다. 1951년 8월 15일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3회 광복절 행사가 열렸다. 신문에서는 1945년 8월 15일을 시작으로 해서 6회 광복절로 기사를 내기 시작했다. 요즘이면 정부가 정정 보도를 위한 행정적 조치를 했겠지만 전쟁 와중 혼란기에 그럴 여력이 없었다. 당시 혼란을 수습할 행정적 능력이 없었다. 이후 서서히 1945년 8월 15일로 광복절에 대한 기억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지 못했다. 일제의 해방에 대한 기쁨은 분단에 대한 아픔으로 대치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광복절 축사에서 “일제 해방 뿐 아니라 민국이 성립한 날이다”라고 기념했다. 광복절에 대한 기억이 유지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대한민국이 성립한 날을 국민적으로 되살린 날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당초 있었던 독립기념일을 한국 사람들이 잊게 됐다.

 미국은 해마다 815를 기념해 축하 전문을 보내고 48년을 기점으로 양국 동맹의 의미를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은 45년을 기점으로 광복절 기념식을 가지며 혼선을 빚고 있다. 자기 국가 성립에 관한 기억에서 혼란을 빚고 있다.

2. 왜 잊어버렸나? 대한민국을 괴롭히는 원죄, 즉 분단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는 이승만과 김구의 발언을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토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 주장을 부각. 분단을 촉발한 이야기로 알려지고 있다. 김구의 1948년 2월 발언 소개하며 단독정부 반대 주장 부각. 이 두 가지 사안으로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키면 70~80%의 학생은 김구의 노선에 찬성하게 될 것이다.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은 기득권 세력들의 일신의 안위를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학생들은 김구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김구 존경은 60%, 이승만 존경은 10%도 안 될 것이다. 김구는 효창기념관도 있지만 이승만은 기념관 하나 없다.

 이승만 연구한 류영익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 문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영어 문서에 따르면 -서울 주재 중국 국민당 대표부의 대표 유어만이 김구가 면담한 내용-대한민국 건국 한 달 전 유어만이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냐고 물었다. 김구는 애매모호하고 정치적 태도로 기다려 달라고 답했다. 유어만은 김구가 정부에 참여하면 부통령의 직위에 오르면 우익 진영 단결에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김구가 정부의 요직에 오르면 이용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한민당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말했다.

 <한민당은 국내에서 민족실력양성 운동(지주, 자본가)을 했던 세력이고 김구의 한독당은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한민당은 정치적 세력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 세력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서로 자유민주주의자니 힘을 합치자고 환영회를 개최했다. 당시 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이 국내에서 남아있던 사람은 다 친일파라고 공격함. 이후에도 독립운동 정통성 있는 김구 세력과 합작해서 정치하려 했는데 다 실패했다. 한독당의 젊은 당원들이 친일파와 함께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독당이 장덕수(한민당)를 암살하기도 하는 등 양당간 갈등이 증폭됐다.>

 임시정부는 결코 국제적으로 승인된 정부가 아니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분열된 상태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태평양 전쟁 결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아래 이뤄졌다. 독립운동 세력이 국내에 남아있는 실력양성 세력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국내 세력들은 일제하에서 교육사업, 공장을 짓고 학교를 운영하고, 출판 위해서는 총독부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온갖 풍상 속에서도 먼 길을 보고 일 한 것이다. 한독당의 큰 잘못이다.

 지난 60년간 한국인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상대방을 친일파로 몰아세우고 있다. 반면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단결을 호소했다. 박헌영이 친일파 처단을 요구할 때 갈등을 키우지 말고 정부 수립 후 법 아래에서 해결하자고 얘기했다. 이런 갈등이 자유진영 내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나라가 세워질 때 갈등하고 분열해서 지금까지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

 만약 김구가 끝까지 이승만과 함께 했다면 이승만 독재 있을 수 없고, 정국이 안정된 가운데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김구의 선택이 역사의 큰 기록을 남겼다.

 김구는 북한에 갔다 온 경험을 말하며 전쟁 준비가 한창이다. 앞으로 3년이 지나도 남한은 북한을 따라잡을 수 없다. 북한에는 일본이 남긴 거대 군사시설 있었고 자체적인 무기 생산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전쟁은 필연적이고 북한이 이길 텐데 이승만과 친일파가 손을 잡은 정권에 내가 참여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장래를 위한 길이다.

 상황이 이런대 한국 사람들은 김구를 매우 존경한다. 김구는 실제 대한민국 성립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반대한다. 한독당의 젊은 청년들은 북한에서 쫓겨 나온 사람들로 김구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손에 총을 들 지는 시간문제였다. 김구 총격한 안두익도 한독당원이었다. 김구는 길을 잃고 말았고, 대한민국은 그가 예언하지 못한 10% 가능성으로 자유 민주세력의 지원을 받아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런데 국민 존경의 순서는 거꾸로 되어 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백범일지를 자세히 읽다보니 차이가 있다면 김구는 민족주의와 자유라는 두 가치를 적절히 배치하지 못했다.

 김구는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주의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정치이념으로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할 뿐이지 이념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가 부딪힐 때 김구의 자유주의는 붕괴하고 만 것이다. 공산주의자라도 좋으니까 민족통일을 해야 한다. 수많은 정적을 만들며 대한민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해외 망명객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국내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고 죽이고, 살리고, 아픔을 남겼다. 

3. 민족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민족은 무엇인가? 지금은 학계에 상식이 됐지만, 민족이란 것은 20세기 한국인들이 발견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 의식이다. 19세기까지는 오늘날 민족에 상응하는 정치적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두산 이야기도 20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조선 시대에 백두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민족의 성지’ ‘발상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화론이 팽배했는데 민족의 자존의식은 있지만 주체의식은 없다.

 1927년 최남선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표현하기 시작. 1987년 북한이 백두산 밀림에서 광명성 출현(김정일 탄생)을 새긴 구호나무가 8만7천 그루 발견됐다고 선전함. 1987년 남한에서 고은의 장편서시 ‘백두산’ 발표 시작. 종북주의자들의 정서. 민족적 설화. 공동체를 구한 장군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은 집단적 상징 속에 매몰되어 있다.

 민족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천부 권리의 주체로서 개별 인간을 역사의 기초 단위로 설정하는 자유주의 역사학으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세계를 통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민족주의보다 상위의 보편적인 것이다. 이승만은 자유 가치를 추구해 국가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과 혼란을 겪었지만 60년간 자유를 지켜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이 폭발력을 가진다면 무한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김구를 비판하고, 이승만을 정당화하고, 친일파를 옹호하느냐 주장이 나온다. 이런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이런 일을 할 정치인이 언제 등장할 지 기다리다 지쳤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정치인들이 세를 떨치고 있다. 20세기 한국사를 문명사의 대전환으로 규정하고 실천하는 것. 자유인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질문1. 60년의 한국의 역사를 평가할 때 민족주의 시각, 자유주의 역사관의 차이는?

 대한민국 국가 세워질 때 정치적 주체가 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 국내에서 열악한 조건 하에서 실력을 양성한 세력이 정치적으로 연합해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 노선이 정당했다고 역사를 써야 한다. 건국사를 분명히 해야 건국 이념이 확실해 지고, 이념이 갖는 통합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새로운 이념에 기초해 나라를 세운다는 것에 단기적, 장기적, 복합적 과제가 뒤따른다는 것에 대한 국민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건국의 초창기에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치 지도자들이 왜 그런 판단을 해야 했었는지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양태가 왜 그렇게 됐는지를 봐야 한다. 공은 공으로 과는 과대로. 역사 자체를 성찰적 측면에서. 건국 이후 역사를 통합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2. 이승만과 김국에 대한 평가에서 둘 다 자신의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통합을 못하고 반복했던 것은 안타깝지만 당시 시대적 요구를 다르게 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승만은 시대적 요구가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 건설에 있었다면 김구는 민족주의적 국가 건설에 시대적 요구가 있다고 생각. 당시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던 국가의 상이 무엇인가를 봐야 하지 않나?

 조선시대까지 성리학의 나라였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외래 정치이념이다. 제국주의 시대 해체되면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슈퍼파워가 부딪힐 때 한반도에서 나타난 현상. 당시 한국이 이러한 외래 이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직도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이념이다. 김근태 인터뷰를 보니 자유주의를 기득권 세력의 이념으로 생각했다. 개인의 자유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치철학으로써의 자유주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60년 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친숙한 이념이었다. 조선시대 성왕들이 추구했던 최고 가치 ‘균’ 성리학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대중적 친밀도가 높았다. 당시 가만히 나뒀으면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필요적이다. 잘 훈련된 정치세력이 있던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역성적이고 의지적인 현상이었다. 소수의 정치세력이 국제정세에 힘입어서. 다수결에 따른 것은 아니다.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다수결의 원리가 아니다. 소수의 정치적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장악하는 과정이다.

질문3. 민족이 20세기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다. 해방 후에도 그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민족주의가 통일과 결합되며 우리의 소명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민족주의는 어디로 가게 되나?

 우리는 통일의 당위성을 민족에서 찾고 있다. 민족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공조하는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판이 쉽지 않다. 쉽사리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의 동물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상상력은 규정성을 발휘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지배할 것이다. 민족주의 비판하더라도 그 자체가 갖는 힘은 인정해야 한다. 적절히 인정하고, 대응해야 하지만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마성적인 힘, 냉혹성을 경계해야 한다. 대안의 역사학인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은 북한에 자유의 가치가 확산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통일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공동선언 했지만 그다음 아무런 진전이 없다. 구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통일을 접근하기 때문에 거창한 박수나 합의는 가능하지만 이성적인 정치 영역에서 구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환상을 얘기하고 리얼 폴리틱스에 눈을 감고 있다. 가능하지 않은데 대중의 표를 얻으려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많은 비용을 낳았다. 한국인들이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다면 북한 주민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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