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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병사 수기3] 꿈을 찾기 위한 시간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을 땐, 마치 국가대표 선수마냥 태극기를 바라보던 내 자신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레 느껴졌다

Written by. 박상윤   입력 : 2012-01-20 오전 9: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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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2월 22일, 난 집을 떠났다.
사실 어려서부터 여러 번 같은 경험을 했기에 새삼스런 일은 아니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떠난 캐나다 유학 길. 몇 년 뒤 영주권 취득 후 미국으로 대학을 가면서 또 한 번 집을 떠났고, 중간 중간 한국을 오갈 때마다 매번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집을 떠나야 했다. 새로운 곳을 향한 설렘과 익숙한 곳의 아쉬움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 속에 난 외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15년간 살았다.

 시민권을 취득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나름의 애국심이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자연스레 마음에서 멀어져가기 시작한 후였다. 다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은 채 살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젠가 비록 그것이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사용 받으며 Product of Korea로 살고 싶다는 소망은 분명 소박하게나마 남아 있는 그 정체성으로부터 시작됐으리라 믿고 있다.

 집을 떠나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내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어쩌면 오랜 해외생활 속에 생긴 내 공허함을 내 꿈으로 채워주기 위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당한 한국인으로서 산다는 것, 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사용 받는 것. 결국 내 집을 찾아 가겠다는 내 꿈은 생각만큼 빠르게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필수조건인 군복무는 나에겐 선택사항이었고, 이미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한 20대 후반의 나에겐 부담스러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지만 꼭 군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미국에서 나의 진로가 꽤나 순탄하게 흘러가기도 했다. 원하던 회사에 취직을 하고 집중하며 일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고 난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문화와 삶의 흐름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그 당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군대를 갈 만큼 용감하지 않았던 거 같다.

 고민과 함께 나의 20대는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10년 후, 20년 후 보다 값어치 있는 삶, product of Korea로 살아가는 꿈을 펼치고 싶은 소망은 더 간절해져만 갔다. 또한 좋은 문화, 직업, 환경과 취미생활은 내 삶의 중심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정체성은 내 나라, 내 집에서부터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없는 한 나의 마음은 텅 빈 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조금 힘들더라도 먼 훗날 보다 더 멋진 삶을 사는 것, 어차피 후회 할 바에 조금 덜 후회하는 길로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부모님과 상의 후, 난 한국으로 들어와 입대를 했다.

 서른 살의 입대. 물론 내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흔치 않은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지만, 예상보다 더 어린 나이의 동기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쑥스럽기도 했고, 내 나이에 놀라 반말과 존댓말도 아닌 어색한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모두에게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었고, 갑작스런 통제와 적응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 훈련생 모두는 8주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때때로 몸이 힘들고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었지만,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휑하게 비워진 내 마음은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을 땐, 마치 국가대표 선수마냥 태극기를 바라보던 내 자신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레 느껴졌던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다.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내 집의 땅인 것 마냥 당당할 수 있어서 좋았다.

 훈련소 기간 동안 동기들 사이에 사소한 문제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결국 기댈 사람은 서로 밖에 없어서일까, 결국 힘이 되어주고 같은 편이 되어 주었다. 남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 단체 생활 속에서 조금씩 배워가고 성장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대로 온 지 5개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순간순간이 그립기도 하다.

 군대 오기 전 가장 큰 고민은 아마 자대생활일 거라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많이 혼나지는 않을까.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듯, 항상 즐겁지 만은 않겠지만, 난 내가 속한 부대, 그 중 우리 중대가 좋다. 나이로는 한참 어린 동생들이지만 처음 전입 온 나를 도와주고 먹을 것을 사주며 긴장을 풀어주던 모습들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웃음이 많다. 남들보다 뛰어난 유머를 가진 몇몇 선후임들 덕에 땀이 나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웃고 떠들 일이 많이 있다. 그럴 때면 이별의 아픔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 부담감도 웃음 속에 묻혀 버린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순간들은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좋은 리더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발전 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에서 우리는 지난 삶을 객관적 입장에서 돌아 볼 수 있고, 필요한 부분을 21개월간 충분히 채워서 나갈 수 있다.

  5년간의 사회생활을 하고 온 나로선, 벌써부터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전우들을 보면 도전을 받기도 한다. 난 모든 일에 좋은 열매는 반드시 있다고 믿고 있고, 우리 모두가 꼭 그 열매들을 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아마 우리 각자는 못 느끼더라도 이 시간들을 통해 희생, 도움, 성실, 책임감 등 삶의 귀중한 도구를 배워 나갈 것이다.

 나는 말이 짧아 혼날 때가 더러 있다. 한국말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영어처럼 단어로만 말하게 되면 반말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잘 이해하고 고쳐나가는 중이다.

 아직 전역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때쯤 되면 나의 한국말 실력도 꽤 세련돼 있지 않을까. 아직도 가끔 군대 오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오랜 시간 후회 속에 살았을 거다. 군대를 오지 않은 후회라기 보단 내 꿈과 집을 찾지 못한 후회였을 것이다.

 2011년 2월 22일, 난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다.(konas)

박상윤 (일병) 1101공병단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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