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병사 수기5] The Root
난 입대를 국방의 의무라기보다 대한의 건아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십분 전만해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F-16 기술도서를 번역하며 ‘난 하이칼라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범고래 같은 C-130항공기 날개위에서 진득한 기름과 땀으로 얼굴에 떡칠하며 와이어 작업을 하고 있다.
부대에 내리쬐는 8월 햇살은 따스함보다는 따가움에 가깝지만, 드넓은 활주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달아오른 불쾌지수를 한 풀 꺾어 놓는다. 작업장 주변에서는 동진이가 결재서류를 파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다. 나에게 ‘필승!’ 외치지만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은 ‘더워!’하고 외치는 듯하다.
미국 출신의 동진과 브라질 출신인 나는 소위 ‘외국물 좀 먹은’ 해외파 병사이다. 특기학교를 갓 졸업하고 자대에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브라질’과 ‘미국’이라는 별명이 우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네가 삼바를 그렇게 잘 춘다며?”로 시작된 질문공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날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였고, 동진에게 영어로 청소 방법을 설명하라는 선임병사의 장난기 어린 주문 또한 쉬운 과제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병사들과는 조금 다른 색깔의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다시 사무실, 작업이 끝나고 의자에 앉아 뻐근해진 몸에 기지개를 편다. 퇴근 한 시간 전 오후 네 시 컴퓨터를 켜고 아침에 하던 번역작업을 마친 후 할일없이 부대홈페이지를 서핑하다 ‘아차’하고 영어교육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제와 해설을 인쇄하고 강의를 위한 예습을 시작한다.
이 인쇄물들은 토요일마다 하는 영어공부 모임에서 쓸 교재이다. 생활관 내 병사들을 위해 헌신하는 주임원사님의 권유로 만든 이 모임에서는 TOEIC, TOEFL등의 문제를 같이 풀기도 하고 프리토킹을 하며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병사들의 교육열에 기름을 붓고 있다.
배우는 병사, 아니 이 순간만큼은 학생들은 이병부터 병장까지,‘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광고가 뇌리를 스치며 ‘배움에 계급은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병장의 질문에는 사력을 다해 모든 것을 퍼 주겠다는 헌신과 열정을 바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돌이켜 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을, 외국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후 입대 한 달 전, 부모님과 여동생은 나에게 국방의 의무를 손에 쥐어주고는 브라질 편 비행기에 올라타셨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된 입대 후 조교의 유격 8번 체조 명령에 내 선택이 만족스럽지 만은 않았지만 이곳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시간이 흘러 현실을 색안경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내가 집총한 그 자리를 돌이켜본다. 내가 사랑받으며 태어나 자랐던 이 곳, 우리 부모님이 다시 돌아올 이 곳, 이 곳 우리 대한민국은 불행히도 휴전 중이다. 전쟁 재발의 위험이 점차 커져가지만서도, 무사안일주의 타성에 찌들어 있는 나였고 우리였다.
향수에 젖은 외국생활이 끝나고 출국 전 살았던 동네에 다시 들어섰을 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그 옛 흔적과 향기가 느껴지지 않아 낙심한 적이 있었다. 눈가를 촉촉이 적셨던 그 경험에 비추어보면 난 입대를 국방의 의무라기보다 대한의 건아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내 가족과 내 아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숨 쉴 아름다운 금수강산, 그곳을 지킬 수 있는 권리이다. 도피라는 그 가파른 경사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당당히 입대하여 대한민국인 이라는 자랑스러운 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에 따른 보상은 그 무엇보다 값질 것이다.
제대는 까마득하다. 외국에서 공무를 보시는 아버지의 귀국날짜 또한 가깝지 않다. 홀로 남겨졌기에, 당신들의 몫만큼 더 열심히 국방에 힘쓰는 하루하루.. 오늘 하루 또한 '필승!'이다.(konas)
정한호(일병) 공군군수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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