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1년
"하룻밤이 이렇게도 짧은지 61년 쌓인 회포 앞에는 언제 날이 새는지도 모른 채 밝아오고 있었다."
生者必滅 會者定離라 했지만 본의 아니게 생이별하고서 더는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1000만 이산가족은 "살아 생전 한번이라도 좋으니 만나자"이다.
6.25전쟁 후 휴전선으로 대치하게 된 뒤로는 영영 소식조차 감감한 채 어언 60여년 성상 부모, 형제, 자매 중에는 벌써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여 그 후손인 피붙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바램 하나로 버티고 있는 비참한 실정이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신천이다. 열아홉에 자유를 찾아 傘壽에 접어들었으니 딱 61년이 지난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과정을 다 서술하기로 하면 몇 권의 책으로 쌓일지 모를 지경이니 아예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동생을 만나기까지의 경위와 만나서 나눈 얘기로 엮어 보겠다.
4∼5년 전에 두 여동생이 살아 있음을...
이산가족 된 者치고 이북에 연을 댈만하면 어느 나라 어느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뒤져보지 않음이 없거니와 나 역시 미국, 카나다, 평양을 잇는 라인에서 두 여동생이 살아있음을 확인한지 4∼5년 되었다. 본래 여동생이 셋이었는데 가운데 하나가 산후조리 잘못으로 갔다고 하니 굶어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긴다.
아무튼 그동안 서신왕래와 송금도 할 수 있었으니 가뭄에 해갈은 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교류야 제3자의 중개에 의거하였으니, 3개월 내지 5개월이 걸렸고 버선위로 발등 긁는 격이었지만.
이렇게 지내오던 중 2009년 11월29일 중국 안내인과 국내 안내인 둘이 여동생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권유하여 아들을 데리고 중국 단둥으로 향했다.
인천공항과 직항로가 없어 선양에서 약 230km를 500위안(약10만원)을 들여 택시로 달려가는데 고속도로라는 게 우리의 시골길 정도여서 3시간 정도나 걸렸다. 그나저나 내 머릿속엔 사진으로 본 두 여동생의 얼굴만 가득하여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아니 하였다.
단둥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초라한 민박집으로 우리나라 관광 숙박업소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허술하다. 1박 3식에 150위안(약3만원)이었고 이나마 한 집에 오래 있으면 안되어 하루나 이틀을 넘지 않고 옮겨야 했다. 아마 중국 공안원이나 주변 사람을 의식해서인 듯 하다.
우선 휴대전화로 조카를 불러 막내 동생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압록강을 사이한 가장 가까운 거리의 대화인데 "오옵빠"한 마디 뿐. 서럽고 서러운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극에 찬 울음만이 계속될 뿐 뒷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본래 이름이 信者였는데 三淑으로 바뀌었단다. 이북에서는 여성들의 이름에 "子"자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나. 왜색일소 정책이 이런 면에까지 철저했던 것이다. 나 역시 말문이 막혀 전화를 들고 있는 손이 떨리기만 하였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동생의 목소리인가. 모든 것이 꿈만 같고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 더욱 간절하였다.
동생을 진정시키고 61년간의 변화된 집안의 내역과 살아온 과정을 들어보니 조부모와 어머니, 한 분 있던 형과 누이동생 하나의 세상 떠난 이야기에 흐르던 눈물은 폭포수가 되고 급기야 대성통곡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남긴 말씀이 "내가 죄많은 여인이라 두 아들 잃고 최씨 가문에 代가 끊기는 구나" 하셨다 기에 "지금 여기 내 아들도 데리고 왔다. 손자도 대학 다니고 있다"고 한즉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도 엄마가 얼마나 기뻐하며 눈을 감으셨을까 또 울음이다.
울며불며 한 마디씩 주고받으니 울음이 아니라 울음사이의 말인 것이다. 풍랑에 배가 뜨지 못한다니 내일을 기약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은 선주가 "위험해서 못 간다"해서 하루, 그 다음날은 돈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한 대서 불발, 그러면 건너와서 주기로 하라하니 "이젠 속지 않겠다 해요. 그렇게 믿고 건네주면 번번이 탈북하여 돌아오지 않으니 돈을 어떻게 받습니까?"한단다.
이러고 보니 경계는 심하지, 돈은 없지, 자칫 동생을 사지에 빠트릴 것 같아 오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음성도 들었고, 지나온 내역도 알았으니 이것으로 마음을 접고 돌아가야 겠다 싶어진 것이다.
죽지 않고 건강하면 만날 날이 있지 않겠나 싶기도 하며 안타깝고 서운하기 이를 데 없는 걸음을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번째 만남은 무산되었다.
내가 학생시절 신의주에서 단둥을 보았을 적에는 길거리와 바다에 뜬 배들이 다 석탄을 뒤집어 쓴 듯 새까멨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어 단둥은 화려하고 번화한데 신의주는 죽은 도시처럼 활기가 없어 보였다.
강변에는 수양버들만 서있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유람선을 타려 했으나 손님이 차기만 기다리고 있어 보트를 탔다. 말하자면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택시를 탄 격이다. 신의주 쪽 기슭으로 더 가까이 가자고 하니 벌금이 100위안이라 하여 그만 두었다.
압록강 철교는 6.25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단둥쪽으로 600m 정도는 그냥 있고 신의주 쪽으로 360m 정도가 끊겨 있었다. 중국은 이것도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입장료 40위안(8천원)을 받고 있었다.
이왕 온 김에 들어가 보니 꽤 두꺼운 철판들이 찢긴 것으로 보아 폭탄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단둥에 나와 있는 북한 식당에 들려 보기로 하였다. 한복차림의 안내양 인도로 라운드 테이블에 자리하여 모처럼 고향음식을 맛보는 구나 하는 기대감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김치는 옛 맛 그대로 이고 국물도 시원하였으나 내 입맛이 변했는지 옛 맛을 잊었는지 그도 알 수 없고 이곳은 반찬이 따라 나오는 게 아니라 따로따로 계산을 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가까워 올 무렵. 2011년 10월11일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중국에 나와 있는 조카였다. 엄마가 나왔으니 바로 오라는 사연이었다. 이미 비자야 항시 대비 중이니 비행기 표만 끊으면 출발할 수 있다. 대략 여장을 갖춰 이튿날 15시 ke 833편. 선양으로 향했다. 중국과 우리는 시차가 한시간이다. 비행시간 1시간 45분, 조카사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초면인데 대뜸 알아 웬일인가 했더니 사진으로 얼굴을 익혔다는 것이다.
조카가 사는 곳은 단둥에서 대련 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는 서해안 동항 시였다. 집에 도착한 20시30분경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3모녀가 와락 달려들어 안기는데 동생은 몸부림치며 통곡한다. 이게 얼마만인가? 얼굴을 살필 겨를도 없이 한참을 통곡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61년간 쌓인 한 맺힌 서러움이 폭발한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여덟 살에 헤어져 고희를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얼굴은 까맣게 타들었고 손바닥은 가랑잎처럼 까칠까칠, 몸에 살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어 완전히 엉성한 뼈에 가죽을 씌워놓은 형상이다. 허리도 구부정, 치아도 빠진 채 움푹 들어간 볼, 볼수록 눈물밖에 안 나왔다.
얼마나 모질고 험하게 살아 왔으면 이지경이 되었을까? 애처롭고 가련하여 측은한 생각뿐이다. 내가 있는 집안에서 여동생들이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느라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조카가 정성을 다해 저녁을 차려왔다. 워낙 못 먹고 살아서 인지 오빠를 만난 기쁨에서인지 동생의 먹는 상태가 신통치 않았다. 나 역시 복 받치는 감정에 메어, 뜨는 둥 마는 둥 상을 물리고 둘이 마주앉아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 갔다.
우리가 살던 집은 폭격으로 박살이 났다 한다. 풍문에는 우리 고장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교와 교회를 많이 지은 고장이라 폭격을 겪지 안 했다고 들었는데 하필이면 우리 집 뒤에 있던 교량이 목표였는지 훌러덩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집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어 외갓집, 고모집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앞서 형이 인민군으로 끌려가 1950년 10월 2일 전사했는데 그 유족이라고 집을 한 채 받았으며 배급이 있을 때도 제법 우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동생의 말인즉 “큰오빠는 돌아가셨지만 집을 주었고 작은 오빠는 남쪽으로 갔지만 생활비를 보태주고 있으니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네요”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행복인가. 자칫했으면 형과 총부리를 맞댈 뻔도 했구나.
하룻밤이 이렇게도 짧은지 61년 쌓인 회포 앞에는 언제 날이 새는지도 모른 채 밝아오고 있었다.
동생은 2박 3일 일정으로 나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엔 들어가야 한다. 북에 자식들을 두고 왔으니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이미 딸과 외손녀가 탈북하여 중국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조카사위는 못내 아쉬워 자기 장모인 내 동생에게 하루 연장 시킬 테니 삼촌과 하룻밤 더 묵으시라고 했으나 내가 만류했다. 서해 바다로 몰래 2박 3일 계약된 배를 하루 늦게 보낼 수도 없고 헤어지는 것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서운하지만 동생의 귀환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약속대로 들어가라고 한 것이다.
10월 13일 저녁 6시 떠날 시간이다. 밖에는 차가 대기하고 있다. 뼈저린 아픔을 쓸어내리며 다시 헤어져야 할 운명의 시간인 것이다. 이제는 영영 생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바람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놓았으니 잘만 되면 공식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부디 구성에 사는 여동생에게도 안부 전하도록.
한참 동안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던 동생이 “오빠 몸성히 오래오래 살아 계세요. 그리고 이젠 우리들 걱정하지 마시고...” 이것이 동생의 마지막 인사였다.
61년간 늘 그리며 살아왔던 우리 남매, 겨우 1박 2일도 만남이라고 다시 헤어져야 하다니.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쉬운 이별이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 많은 눈을 감은 연로한 이산가족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축복 속에 살고 있음을 늘 감사한다.(konas)
최명옥 (예비역 병참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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