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호국 인물 여준(呂準)선생. 조달진 소위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 6.25전쟁 영웅 조달진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 가 7월의 호국 인물로 여준(呂準)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조달진 육군 소위를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 일생을 독립군 양성과 항일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다간 여준(呂準)선생
여준(呂準)선생은 오산학교, 서전서숙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서로군정서 부독판,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선생은 1862년 죽산군 원삼면(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민중의 애국사상고취를 위한 교육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고 민족교육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이듬해 제2대 숙장이 되어 서전서숙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통감부 간도 파출소의 감시와 방해, 재정난으로 3개반 74명을 단기 속성과정으로 졸업시키고 1907년 8,9월경 폐교하게 되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는 한편,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
1917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으로 옮겨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의 정령으로 추대되어 박찬익·김동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길림에서 ‘길림군사독판부’의 단장으로 무장투쟁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한족회’가 임시정부 산하 군정부인 ‘서로군정서'로 편입되자 부독판을 맡아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에 선임되어 서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 규합과 임시정부의 개조를 위해 노력하였고, 1922년에는 자신이 최고의 독립운동 방략으로 생각한 교육활동을 위하여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1932년 만주사변 와중에 서거하기 까지 일생을 독립군 양성과 항일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홍천 말고개의 용사 조달진 소위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강원도 홍천 대전차 진출 저지를 위해 제6사단 19연대 소속 조달진 일등병을 포함한 11명의 특공대가 말고개에서 벌인 전투상황으로 6월 28일 10시경 말고개를 지나던 전차대열에 대전차포 공격과 연막 수류탄을 사용, 적 전차 승무원을 모두 하차하게 하여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 24명의 적을 사살한 전과를 올렸다.
특공대는 육탄으로 적 전차를 공격하는 용맹과 투지를 발휘해 국군의 사기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30일까지 홍천을 사수해 적의 남진을 3일간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조달진 일등병은 바로 이등중사로 2계급 특진했다.
조달진 이등중사는 7월 24일 경북 상주군 유곡 북방전투에서도 7명으로 구성된 대전차 특공대를 만들어 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 작전으로 다시 이등상사로 2계급 특진했다.
이후 소위로 특진한 조달진 육군 소위는 이러한 두 번의 공적으로 1950년 10월 을지무공훈장, 2011년 10월 국군의 날에 태극무공훈장(1등급)을 수여받았으며, 아울러 개전 이후 한국군 최초로 미 동성훈장 수여자의 영예를 안았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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