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申翼熙)선생 기념 학술세미나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 맡아... ‘현실’ 이라는 가치와 ‘원칙’을 쫓았던 정치인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남덕우)는 해공선생 탄신 118주년을 맞아 11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던 인물로 임시정부에서 법무·내무·외무총장 등을 역임했고,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날 세미나에서 오영섭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는 신익희 선생을 “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근대사의 고난과 시련을 온몸으로 지탱해 나간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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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의 역량확대 ▲일제로부터의 완전 독립 ▲민주적 자주국가의수립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한민족의 번영"에 일생을 바쳤다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선봉에 섰던 정치지도자로서 지금까지 겨레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피력했다.
특히 “해방 후부터 건국 직후까지 처음에는 김구의 임정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다 이내 김구를 떠나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했고, 건국 후에는 이승만에 대항한 한민당과 손잡고 민국당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치는 다소 어지러운 정치행보를 보였지만 해방 후 그가 관여한 여러 단체나 기관들에서의 활동, 남긴 단편적인 말과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일관되게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히 부식하려 노력했던 신념의 정치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에 대항하기 위해 민국당을 결성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건국 이전 정치제계 구상단계에서 신익희 선생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대통령에 대한 견제장치가 첨가된 내각책임제를 추진했던 반면,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율적 권한 행사가 비교적 강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강렬히 원하고 있어 이에 따른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했다.
김영미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또한 선생의 활동에 대해 “현실에 예민하고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면서 앞서 오영섭 교수가 언급했던 ‘(어지러운 정치행보)정치적 역정’과 관련해 “현실주의 하나가 아닌 현실과 원칙이라는 두 가치의 긴장관계 속에서 전개된 선택”이었다며, “그가 임정과 김구를 버렸던 것은 단독정부수립이라는 ‘현실’ 가치 때문이었고, 이승만과 결별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원칙’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신익희 선생(1892. 7. 11〜1956. 5. 5)은 경기 광주(廣州)에서 출생하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1913년 귀국하여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ㆍ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겸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1948년 제헌국회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유세 중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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