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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인사가 미국에서 고문을 받았다면…

Written by. 이정훈   입력 : 2012-09-08 오전 8: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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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과 ‘반(反) 고문’. 그리고 ‘민주화’는 대한민국이 피를 흘려가며 지켜낸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 분명해 보이는 가치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이 국가 발전(發展)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로 민주화를 억압하고 인권을 제한했을 때, 이 땅의 지식인들과 젊은 피(대학생)들은 인권을 지키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절규했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한 인사는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연설했다.

 조지 워싱턴과 함께 피 흘리며 싸워 미국 독립을 이뤄내고 3대 미국 대통령이 된 혁명가 토머스 제퍼슨은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먹고 다시 싱싱해지는 게 틀림없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고 말 한 적이 있다.

 제퍼슨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희생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 말을 했는데, 민주화 운동의 대부는 ‘민주주주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란 말로 명쾌히 정리해낸 것이다.

 나는 지식이 짧아서 민주와 자유의 차이를 명확히 정리해내지 못한다. 민주와 평등, 평등과 자유 사이의 간극도 잘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민주는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신념은 갖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의무감도 갖고 있다. 제퍼슨이 이야기한 ‘자유의 나무’와 민주화의 대부가 거론한 ‘민주주의란 나무’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엔 공통점이 훨씬 많을 것으로 믿는다.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자유가 있어야 하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해야 하니까. 민주는 목숨까지는 몰라도 피 흘려가며 지켜야 할 가치가 분명하다.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화와 인권을 짓누르던 시기, ‘이근안’이라고 하는 경찰관이 맹활약했다. 대공(對共)과 방첩분야 전문 수사관으로 활동한 그는 체포한 민주화인사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강력한 고문을 가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전두환 정부가 물러난 다음인 1988년 그는 그가 고문했던 민주 인사들로부터 고문을 한 혐의로 고발돼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운동권 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숨겨 오랫동안 ‘잠수’를 했다. 그는 10년 이상을 숨어 지내다 북한에 대해서 햇볕정책을 펼쳐 더욱 민주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정부가 들어선 1999년 ‘드디어’ 자수를 했다. 법원은 그의 고문 혐의를 인정해 7년형을 선고했다.

 2006년 만기 출소한 날 그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고문을)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이씨는 복역 중에 통신과정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때문에 출소한 다음인 200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이후 이씨는 자신이 고문을 한 것을 애국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돼 올해 1월 목사직에서 면직되었다. 이씨에 대한 이러한 제재는 대한민국이 고문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하는 윤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고문에 반대하고 인권을 지키려는 민주화된 나라임을 보여준 것이다.

 대한민국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고문 없는 나라, 인권이 보장된 나라, 민주화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이 땅의 민주 인사들이 30여 년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가며 이룬 거대한 혁명이었다.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향해 자유·평등·박애의 사상을 전파했다. 미국 독립을 가져온 미국 혁명은 천부인권을 거론함으로써 세계인권선언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민주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렇다면 한국이 30여년 간 이뤄온 민주혁명은 어떤 이념으로 세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가?

 지난 7월 20일 114일간 중국에 구금돼 있던 북한 인권운동가 김영환 씨가 강제추방 형식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환에는 우리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중국 공안부장의 최초 방한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이 많다. 중국 공안부장이 방한했을 때 한국 경찰청장 등은 공안부장을 환대하고 언론에 김영환 씨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했다. 경찰청장의 예측대로 김씨의 귀환했다.

 그런데 돌아온 김씨가 중국에 구금돼 있을 때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김영환 씨가 누구인가. 그는 적어도 386세대에게 전설을 남긴 사람이다. 소신을 버렸다는 비판이 있고 바른 길을 보고 극적인 전환을 했다는 찬사도 받은 인물이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스탈린의 본명이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스탈린은, 1878년 지금은 소련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그루지아 공화국에서 태어났을 때 분명 그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1905년 그가 열렬히 추종하던 레닌이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스탈린’을 별명으로 붙여준 다음부터는, ‘조세프 스탈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 점에 주목해 ‘스탈린, 강철권력: 문제적 인간’이라는 역저를 냈다. 로버트 서비스의 저서를 통해 ‘스탈린=강철’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알려지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자생적 공산주의자(자콤)가 그 사실을 알았다.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김영환 씨가 그 주인공. 그는 주요 대학의 학생회가 부활됨으로써 학원 민주화가 개막된 1985년, 읽어왔던 공산주의 원전(原典)에 대한 이해와 들어왔던 북한의 한민전 방송 등을 토대로 생각을 정리해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각 대학의 운동권 세력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이 편지에 붙인 그의 필명이 ‘강철’이었다. 때문에 이 편지는 ‘강철서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비밀리에 전파되는 각종 문건을 P(print)로 불렀다.

 강철서신은 단순히 혁명론을 전파하는 게 아니라 혁명가가 갖춰야 할 ‘품성론’, 혁명가는 수령이 이끌고 혁명을 하려는 사람은 수령을 따라야 한다는 ‘수령론’ 등을 언급했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순식간에 강철서신은 많은 대학 운동권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P가 되었다.

 1986년 김씨는 이러한 지지를 기반으로 최초의 주사파 조직으로 꼽히는 ‘구국학생연맹’을 만들었다,. 그해 말 그는 이 연맹 결성 건으로 구속 기소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그때만 해도 주사파는 발아기(發芽期)였고, 주사파의 위세가 이렇게 커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는 대학생 출신인데다 처음으로 범법자가 되었고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그는 중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1988년 12월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할 수 있었다

 석방 이듬해 2월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을 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는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1990년에는 이 조직의 총책을 맡았다.

 그리고 1991년 고양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그는 제적됐던 서울대에 복학했다. 그 시기 그는 북한과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서울대에 복학한 그해 그는 북한이 보낸 반(半)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 시기 그는 전국적인 주사파 조직인 민혁당을 만들었다. 그는 과거의 지하당과는 다른 방식으로 민혁당을 만들었다. 그때까지의 지하당은 북한에서 지도원 등으로 불리는 공작원이 내려와 한국 사람들을 포섭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지도원들은 대개 남쪽에서 올라간 남로당 출신이 다수였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이 40여년을 넘기자 남로당 출신은 나이가 많아져 도태됐다. 때문에 북한은 북한에서 성장한 사람을 공작원으로 뽑아 한국으로 침투시켰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이렇다 할 연고자를 찾지 못해 포섭 공작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러한 때 대한민국에서 주사파가 만들어지자 북한 공작조직은 주사파 쪽으로 접근했다. 김영환 씨는 첫 번째 대상이었기에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반잠수정을 타고 이북에 가 김일성을 면담했다.

 민혁당은 주사파 출신을 중심으로 지방 조직을 만들었다. 쉽게 설명하면 인천의 민혁당, 영남의 민혁당 식으로 지역당을 만든 것이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아들인 김정일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권력세습을 계기로 김씨는 큰 전환을 했다. 주사파는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공산주의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판단도 했다.

 그때부터 김씨는 그가 만든 주사파를 스스로 허무는 노력을 했다. 제일 먼저 호남의 주사파를 없애는 노력을 펼쳐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영남의 주사파를 해체하는 노력을 할 때 안기부가 민혁당의 존재를 알아챘다.

 안기부는 바로 수사에 착수했는데 해체 문제로 내홍을 겪던 민혁당의 영남 조직이 안기부의 타깃이 되었다. 안기부는 영남위원회로 불린 이 조직을 조사하면서 김씨의 특이한 행동에 주목했다. 김씨는 영남위원회 와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안기부의 수사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안기부 수사를 계기로 영남위원회가 와해되자 다른 지역에 구축된 민혁당 조직원들이 잠수에 들어갔다. 길고 긴 동면에 들어간 것이다.

 영남위원회 와해를 계기로 김씨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주도해온 주사파식 운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거론했다. 처음에는 대표적인 좌파매체인 '말'지를 통해 그러한 주장을 하다 이후로는 보수매체인 ‘월간조선’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 시기 김씨는 과거의 동지로부터 변절했다는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과거의 동지 가운데 일부는 안기부가 펼친 영남위원회 수사로 투옥됐으니 그에 대한 공격은 가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공격을 받으면서 김씨는 대학생 시절 운동권이었으니 동유럽과 소련 붕괴를 계기로 공산주의를 버린 사람들이 결성해서 만든 계간지 ‘시대정신’에 핵심 필진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대정신과 함께 움직이면서 그는 북한 인권운동가 변신했다. 원조 주사파로서 가장 드라마틱한 전환을 한 것이다.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탈북자 출신 대북운동가들이 북한으로 전단을 보내기 위해 기구를 띄우는 것으로 이슈를 만들 때 그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강철서신을 통해 음지에서 사람을 움직였던 그 방법 그대로 조용한 북한 해방 운동에 들어갔다.

 과거 주사파는 대한민국에서 주체사상에 따라 민족해방을 펼치려했다. 주사파는 당시의 대한민국은 안보를 미국에 의탁하고 있으니 ‘신식민지’ 상태에 있고 경제는 정부가 주도하니 ‘국가독점자본주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이름하여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본 것인데, 이는 ‘신식국독자론(대한민국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다는 이론)’으로 약칭됐다.

 신식국독자론에 대비되는 것이 ‘식반자론(植半資論)’이다. 식반자론은 순수 공산주의에 가까운 민중민주주의 세력이 정의한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PD 계열로 불렸던 민중민주주의 세력은 대한민국이 정치군사적인 면에서는 미국의 식민지이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절반 정도 자본주의를 이뤘다며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주장했다.

 민족해방 계열로 불리던 주사파의 신식국독자론,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식반자론은 대한민국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보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을 지배하는 세력을 걷어내고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를 없애자는 혁명론을 만들어냈다.

 혁명은 영어로 Revolution이기에 R 로 약칭됐다. 대한민국의 상태에 대한 판단과 대한민국을 어떤 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데 대한 생각은 달랐지만 NL(주사파), PD(민중민중주의파)는 모두 혁명을 추구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R로 전복을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운동권이 대한민국 전복을 위한 혁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전복을 해야 하는 대상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이 아닌가란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구체화하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시대정신 사람들이 북한 민주화 혁명을 위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후 ‘북한 주민 구하기’가 이슈가 되었다. 배고픔과 압제에 눌린 북한 주민을 구하려면 세습을 거듭하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려야 하는 혁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조심스럽게 등장했다. 대한민국은 1986년 6월 항쟁으로 불리는 거대한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자유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나라가 되었다.

 프랑스대혁명처럼 급격한 변혁은 겪지 않았지만, 지방차치를 하고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화된 나라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경제에서도 성공하고 정치에서도 성공한 흔치 않은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 핵안보정상회의 같은 거대한 국제행사도 치를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지 못할 때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제3세계의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을 벤치마킹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대한민국의 업적이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수출의 유일한 사각지대가 가장 가까이 있는 북한이었다. 이상하게도 한국은 북한에 민주화와 시장경제에 의한 경제발전이 전파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지 않았다. 거의 유일하게 이 노선을 걸은 세력은 김씨를 필두로 한 시대정신 관계자들이었다.

 북한 변혁을 위해 노력하던 김씨가 중국의 국가정보원인 국가안전부에 검거된 것은, 그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움직임에 당황한 북한의 국가정보원인 정치보위부가 그에 관한 정보를 중국 국가안전부에 전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부에 체포된 김씨는 과거 안기부의 조사를 받을 때 민혁당 조직에 대해 함구한 것처럼 버텼다. 그의 침묵이 계속되자 중국 국가안전부는 전기봉으로 전기고문까지 했다. 김씨는 중국에서 돌아온 후 이러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변화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민주화 운동가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에 가 반미운동을 하다 체포돼 미국 FBI나 CIA로부터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한다면 많은 국민들은 분노할 것이다. 서울시청이 좁다하고 몰려들어 촛불시위를 벌이고 주한미대사관이나 청와대로 몰려가는 거대한 시위를 벌였을 것이다.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유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해도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중국이 고문을 가하고, 고문을 당한 이유는 북한 민주화운동 때문이었다고 하자 전혀 국민적인 반응이 없었다.

 김씨는 자신이 전기고문 받을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분당 서울대병원 등에서 정밀검진을 받았으나 시간이 많이 흐른 탓으로 병원 측은 뚜렷한 고문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오히려 안도하는 세력이 있었다. 왜 우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북한 민주화 운동은 외면하는 것일까. 그러한 북한을 부여잡고 보호해주는 것이 중국인데 중국이 펼치는 고문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닿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점 때문에 대한민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거대한 진보를 이뤄내고도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인권과 민주화 반고문은 보편적인 가치인 만큼 상대가 누구이든 똑 같은 잣대를 들이 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인류 역사 발전에 제대로 기여하는 길이고 압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독재로부터 구해내는 길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이 길을 갈 것으로 믿는다. 민주화 운동도 초기에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운동가들이 자기 희생을 하자 본격적인 국민 참여가 이루어졌다.

 넥타이 부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대한민국은 한 순간에 민주화된 나라가 되었다. 북한 인권운동도 이러한 과정을 밟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강철·김영환 씨의 노력을 외면하지만 잠시 뒤에는 북한 민주화를 위한 거대한 요구를 할 것으로 믿는다. 대한민국은 역사와 세계 앞에서 비겁하지 않은 역사를 만들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Konas)

이정훈 (월간조선, 주간조선, 시사저널, 신동아 기자 역임)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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