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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봉쇄...북한 단독정권 수립...분단고착 ①

Written by. 양동안   입력 : 2012-11-10 오전 7: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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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역사상 군사분계선이 곧바로 민족이나 국토의 분단을 초래한 사례는 전무하다. 다만 군사분계선이 단순히 군사작전상의 분계선으로 끝나지 않고 주민들의 통행·통신·통상을 차단하는 생활의 분단선, 행정의 분단선으로 전환되면 그 분계선은 분단선으로 변질된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세력은 분단정권을 만들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정부’나 ‘정권’이라 말하지 않고, ‘중앙행정주권기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의 각종 좌익단체들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우리의 정부’, ‘인민의 정권’이라고 선전했다.”

 “남한의 애국세력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남한을 정부 없는 혼란 상태로 방치하여 조만간 공산화되는 것을 수용하거나, 우선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 정권을 공고히하여 그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들의 사회적 선전력이 매우 강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나쁘게 왜곡하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대한민국 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왜곡된 주장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에 관한 왜곡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실시된 5·10선거의 양상 및 건국주도세력에 관한 왜곡이다.

 한반도 분단은 소련군의 38선 봉쇄에서 비롯된 것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날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8월 9일부터 한반도 북쪽 끝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소련군은 공격개시와 동시 쉽게 한반도로 진격했다.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8월 10일 연합국들에게 항복의사를 통고하면서 항복조건을 협상하자고 제의했다. 소련군의 한반도 진격 정보를 접수한데 이어 일본의 항복의사를 전달 받은 미국은 일본의 항복 선언 전에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점령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황급하게 움직였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 앞서 연합국 정상들의 회담에서 합의된 한반도에 대한 공동신탁통치 실시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실무자들은 8월 11일 미-소군이 준수해야 할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으로 북위 38도선이 적당 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8선을 한반도에서의 미군과 소련군의 군사작전 분계선으로 정하자는 미국의 제안은 8월 15일 미국 대통령 트루만에 의해 스탈린에게 통고되었으며, 스탈린은 다음날 그에 대한 동의 의사를 미국에 전달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항복 선언 직후 며칠간 휴식을 취한 한반도 진입 소련군은 8월 21일부터 38선 이북의 북한지역에 대한 점령을 신속하게 전개했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함에 있어서 북한 지역의 최남단 지역인 38선 지역부터 먼저 점령한 다음 그 북부지역을 점령했다.

 소련군은 8월 23일부터 28일까지의 기간에 서해안에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인근의 북한지역의 교통요지들을 모두 점령했다. 38선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장 38선 이남 지역과 이북 지역간의 인적 왕래, 물적 교류, 통신을 모두 차단했다. 소련군의 38선 봉쇄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단행되었다.

 뒤늦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북한점령군 소련군에게 38선 봉쇄는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할 수 있음으로 38선 봉쇄를 해제하고 남북한의 행정을 통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협상을 전개하자고 3차례나 제안했으나 소련군은 이를 무시하고 38선 봉쇄를 지속했다. 미군도 결국 소련의 일방적 봉쇄에 상응하여 38선 지역 경계를 강화하게 되었다.

 소련군만 38선을 봉쇄하고 미군은 38선 경비를 하지 않으면,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소련군 병사들의 약탈이 자행되는 것과 남한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기 위해 북으로부터 남에 파견되는 요원들과 남한 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북한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5년 12월에 이르면 38선은 적대국 간의 국경선처럼 변해버렸다.

 어느 나라에서나 복수의 국가 군대들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되면 군사작전 분계선을 설정한다. 그러한 작전 분계선이 설정되지 않으면 작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연합군끼리 충돌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이러한 군사분계선이 단지 군사분계선만으로 끝나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의 통행·통신·통상을 방해하지 않으면 해당지역의 정치적 분단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민간인들의 통행·통신·통상이 차단되면, 다시 말해서 군사분계선이 생활의 분단선으로 변질되면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해당지역의 정치적 분단을 초래 하게 된다.

 한반도의 분단은 38선이라는 군사분계선 이 설정되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군사분계선 이었던 38선을 생활의 분단선으로 변질시킨 소련의 조치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북한의 단독정권 조직과 공산화로 확정되었다.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는 것과 동시에 각 도와 시·군 단위 및 대규모 공장이나 산업시설에 군경무사령부(위수사령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행정단위별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그와 더불어 소련군에 동조하는 한국인들의 자생 무장조직과 협조하여 북한 전역 을 무력으로 통제하고, 소련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치안사범’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다.

 소련군은 민 간인 대상 행정업무 인력을 강화하여 평양과 기타 지방에서 정치공작과 각급 한국인 인민위원회에 대한 행정지휘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소련군은 북한 사회주의화 추진의 최우선 핵심적 사업으로 북한지역의 독자적 공산당을 조직하는 일을 추진했다. 북한지역 공산당 조직은 김일성을 비롯한 25군 휘하의 한국인 항일빨치산부대원들을 동원하여 수행했다.

 소련군은 김일성 등 빨치산대원들을 45년 9월 중순 비밀리에 입국시킨 후 그들을 각 지역 경무사령부의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배속시켜 각자의 파견지역에서 공산당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10월 13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을 설립했다. 소련군은 다음 날 평양에서 김일성 환영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김일성을 탁월한 독립운동 지도자로 북한주민들에게 부각시켰다.

 소련군은 1945년 12월 17일부터 북조선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격상시키면서 북한지역에서의 북조선공산 당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공산당의 통치기반 강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소련군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공산당 위원장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 위원회라는 명칭의 북한지역의 단독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지역에 적용될 각종 법률과 정책을 의결하고 집행하며 법률과 정책을 위반한 자들을 처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세력은 분단정권을 만들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정부’ 나 ‘정권’이라고 말하지 않고, ‘중앙행정주권기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법령을 결정하고 집행하며 법령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중앙행정주권기관의 학술적 명칭은 ‘정부’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 북한의 각종 좌익단체들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우리의 정부’, ‘인민의 정권’이라고 선전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출범하자마자 북한을 사회주의화(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화를 ‘민주화’라고 부르며,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용어사용법에 따라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화도 ‘민주화’라고 호칭했으며, 사회주의화를 위한 변혁도 ‘민주화개혁’이라고 호칭했다)하기 위한 변혁에 착수했다.

 임시인민위는 3월 하순 사회주의화의 종합계획인 ‘20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그에 따라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화에 필요한 변혁조치들을 실행했다. 그중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적 토지개혁,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자 제거, 학생과 성인을 상대로 한 사회주의사상 주입교육 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진행한 핵심적인 사업은 토지개혁이었다.

 사회주의적 토지개혁은 ‘20개 정강’이 발표되기도 전인 3월 1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각 농촌에 거주하는 빈농과 고농들이 농촌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농촌위원회가 그 지역의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직접 강탈하여 나누어가진 후 지주 들을 그 지역에서 추방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며, 토지개혁은 북한 전역에서 약 20일 만에 완료되었다.

 북한공산당은 북한에서 단독정권을 만들고 사회주의화작업을 진행하는 것을 ‘북조선민주기지론’으로 정당화했다. ‘북조선민주기지론’이란 한반도 전체를 사회주의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을 사회주의화의 기지로 건설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소련군과 북한의 좌익세력은 1946년 여름부터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사회주의화작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보다 안정된 정권담당주체를 확보하기 위해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귀국하여 만든 정당)을 하나로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들은 또 1946년 11월부터 임시정부(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아닌 정식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 11월에 북한 지역의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실시했다. 각급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북한의 좌익연합단 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내세운 단일 후보자에 대한 찬반을 묻는 공개투표(흑백상자 투표)를 통해 진행되었다.

 1947년 2월에는 평양에서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 북한지역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회의는 곧이어 제1차 회의를 소집하고 2월 22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한지역의 정식정부인 북조 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출범과 함께 각급 지방행정기관인 도·군·면·동·리의 지방 인민위원회를 강화하고, 인민경제계획을 수립·집행하여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남북한 어느 쪽에서든지 유혈혁명이 일어나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군사력으로 정복하지 않는 한 동질적인 사회로 환원될 수 없는 분단 상태로 들어갔다.  이제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는 한 한반도가 단일 통치단위가 되는 것, 즉 통일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계속)(Konas)*본 칼럼은 충호지10월호에도 게재 되었음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현대사상연구회 회장)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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