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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를 담은 비련의 기록

Written by. 최재원   입력 : 2012-12-13 오전 1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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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말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정체성을 잃은 체 살아가고 있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고,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원이며 우리가 태극기를 향하여 거수경례를 올리는 이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애국가가 울려 펴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움, 전율. 이것의 바탕에는 민족의 정체성이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5천만 국민이라면 모두 아는 애국가이다. 이중에‘우리나라 만세’... 이 구절이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애국가를 듣고 따라 부른다. 점호 때나 국기게양식, 프로야구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 시작할 때.. 이 애국가조차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분노와 비참함을 느끼며 속으로 삼켰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이다. 이 때야 말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당한 때라고 할 수 있겠다.

 백범 김구. 어렸을 적부터 가장 많이 본 독립운동가중 하나로써 1949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평생을 독립과 조국을 위해 분골쇄신한 인물이다.

 그 동안 초, 중, 고 방학숙제나 대학교에서의 과제 등을 하면서 백범일지를 몇 번 들춰보았을 뿐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백범일지를 읽고 나니 백범과 묘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나는 20세의 어린나이에 나의 젊음과 청춘을 조국에 바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백범 또한 열악한 시대에 태어나 그 한 몸을 조국을 위해 던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민족의 위대한 등불’,‘민족의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그의 이미지는 청년기의 경험과 배움 그리고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바탕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백범과 나의 교집합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백범일지에서 단순히 종이로 만든 책의 느낌이 아니라 후세를 위하여 아직도 자신의 큰 뜻을 세상에 피력하는 듯한 백범의 숨결과 역사의 심박동을 느꼈다.

 여러 구절 중에서도 특히 백범 김구의 한국 독립당의 1949년 1월 1일 신년연설이 생각이 난다.“우리나라는 옛 적부터 오늘까지‘대가리 싸움’곧 헤게모니 싸움으로 말썽이 많았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싸움이 벌어져서 서로 머리가 되려고 머리가 부서져라 싸움만 하고 누구하나 발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이 부분에서 스스로 유력인사로, 혹은 중심으로 할 만큼 헌신했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어 발이 되기를 마다 말고 노력하라고 호소했던 백범의‘겸허 정신’을 폐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백범일지는 스스로의 허물과 실패, 성공 등 자신의 인생을 써내려간‘수기’로 백범의 인생을 잘 알 수 있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 백범의 생생한 가족사이다.

 백범의 든든한 후원자로 인천 옥에 갇힌 자식을 뒷바라지한 아버지 김순영, 서대문 감옥에 갇힌 남편을 옥바라지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13년 연하의 젊은 아내 최준례, 서대문 감옥에 갇힌 백범을 면회를 와서,“나는 네가 평양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하면서 여든 평생을 외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삶은 지금까지 보아온 흥미위주의 드라마 혹은 사극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그 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옥중 생활을 생생히 기록되어있어 그 때의 시대상을 알 수가 있었다.

 백범은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척결한 사건으로 인천옥에서 1년 7개월, 안악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4년 6개월 등 총 6년이 넘는 옥중 생활을 경험하였다. 이렇듯 백범일지는 쓰여 진지 오래 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주는 책이다.

 백범일지를 읽고 내 생각과 글을 통하여 새롭게 숨결을 불어넣어‘나의 백범일지’를 탄생시키고 싶었고. 백 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의 부족한 나와 당시의 모든 역경을 초월한 백범과 정신적 교감을 하고 싶었다.

 2.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백범이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쓴 책으로 처음에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자신에게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돌아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스스로 지낸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쓴 들이 上권이고 下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에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 없이 살아남아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고 국내, 넓게는 하와이, 미주 등 동포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상권의 시작은 두 아들에게 알리는 글로부터 시작하여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었다. 백범의 조상은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 경기도 고양군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역시 서울과 가까운 지방이라 멀리 해주 읍의 백운방 텃골(지금의 북한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팔봉산 양가봉 밑으로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고로 소위 양반의 자손이지만 역적의 방계 후손이라 일반 양인의 신분으로 속여 숨어 산 것이다.
 이것으로 백범일지를 보기 전에도 TV드라마와 백범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볼 때 들어 온 사실로 백범의 유년 시절‘상놈’이라 차별받고 힘들었던 장면이 다시금 떠오르게 하였다.

 백범은‘병자수호조규’흔히 강화도 조약의 체결시기인 1876년 7월 11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고름이 돋을 쯤에 어머니가 그 전에 민간에서 해오던 종기 치료 방식처럼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짜내는 바람에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문득 다산 정약용이 떠올랐다. 다산선생 또한 어렸을 적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많이 남게 되어 많은 놀림을 받게 되셨다고 하였다.

 문득 에스파냐 왕국의 아즈텍 문명 침공도 생각이 났다. 에스파냐 왕국의 코르테스가 200여명의 화승총병을 이끌고 침공했을 시 아즈텍의 전투요원은 수십만이 넘었다고 하였는데 이때 맥없이 아즈텍이 점령당한 이유로 의학사학자들은 에스파냐 군인들 중 천연두 보균자로 인해 면역력이 없던 아즈텍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점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렇듯 천연두는 마마로 불리며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는데 백범이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연두를 이겨낸 백범은 잘 성장하여 한글과 한문을 익혔는데 타락한 과거를 보고 실망하여 아버지가 주신 관상서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 중에서 『상서』라는 책을 보았다고 하며 마음에 들었다는 구절을 적어 놓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상이 좋은 것은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이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 구절은『백범일지』를 읽던 나에게도 신성한 충격을 주었다. 최근에 스스로 내 인생이나 내 행동, 현재에 대해 좌절감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의 차이 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라는 것이 제일 바로 잡기가 제일 힘든 것인데....

 백범은 18살에 동학의 사상에 심취하여 가입, 어린 나이에 접주가 되어 팔봉접주 혹은‘아기접주’라 불렸다. 솔직히 백범의 동학 활동에 대해‘근현대사의 이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백범은 해주성 전투 등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행동력과 실패가 후에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지도하는 주석으로서의 역량을 키워주는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후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의 보살핌으로 동학 탄압시 몸을 피해 있다가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척결한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수감되는데 재판하는 데에 이르러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 등 남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 한 말이 “지금 소위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니 국제공법이니 하는 조약규정 가운데 국가 간에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뒤에 그 나라임금을 살해하라는 조문이 어디 있느냐?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살해했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 너희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서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인데 이에 나온 『만국공법』은 개항 기에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근대적 국제법에 관한 책인데 아직 동학의 영향만 받고 신서적을 접하지 못한 백범이 만국공법에 관한 내용을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백범이 말한 내용은 1896년 면암 최익현이 명성왕후 시해를 비판하여 올린 상소문 중“각국이 통화하는 데에는 이른바 공법이라는 것도 있고 또 약조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같은 공법과 약조 속에 과연 이웃나라의 역도들을 도와 다른 나라 군주를 위협하고, 다른 나라 국모를 시해할 수 있다는 글이 있는지 신은 알지 못 하겠습니다.”라는 글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문장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재판정에서 당당했던 백범의 기개는 사형을 언도받음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 고종황제의 사형중지령을 받고 석방되어 교육활동 등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 교장을 역임하게 된다.
 
 이 해 12월 노백린과 함께 서울 가는 길에 마을에서 부인을 위협하며 난동을 부리는 이재명 의사를 만류하여 그의 권총을 빼앗았는데 얼마 뒤, 그가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가 실패한 이재명 의사임을 알고 총을 뺏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 때 과연 권총을 그대로 두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매국노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의거로 인해 죽을 때 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고 하지만 나라를 팔아먹고 영화를 누린 것은 용서할 수가 없는 짓이다.
 
 안악사건 흔히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는 신민회 탄압사건을 지나 3.1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생활도 하면서 백범 자신의 가족은 여러 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슬픈 소식에 백범의 기분은 어땠을까? 백범의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식의 최고 불효는 부모님보다 일찍 죽는 것이라는 데 백범의 가슴은 찢어지면서도 광복을 위해 멈출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강개한 모습이 아른 거린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부터는 계속 수업시간이나 책에서 많이 배운 내용들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자청하였다가 경무국장이 되었던 일, 신채호와의 마찰, 등 많은 일들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일어났다.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은 한인 애국단 창단 및 활동이었다. 본문에 의하면 재무부장 및 민단장을 겸임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는 “저는 일본에서 온 노동자입니다. 상해에 가정부(일본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지칭하는 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며칠 전에 상해에 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전차검표원에게 임시정부가 있는 곳을 물어보니 보경리 4호로 찾아가 보라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이름은 이봉창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것이 이봉창 의사와 백범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백범이 이봉창 의사에게 이렇게 까지 찾아온 포부를 물으니 이봉창 의사는 “제 나이 서른입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 한들 늙은 생활이 과거 반생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보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육신의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고 싶습니다. 상해에 온 목적도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 싶어서입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본디 이봉창 의사는 서울 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고자 노력했으며 조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피했다고 수기에 적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가 2년 만에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며 뉘우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 전처럼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면 정말 육체적 쾌락은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그의 한 몸을 내던졌다.
 
 저 춘추시대 공자가 한 말들 중에“진정 天意가 부귀에 있다면 백이와 숙제의 비참한 아사는 무엇이고 도척의 부귀영화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天意가 부귀에 있다면 마부로 태어나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天意는 부귀가 아니라 후대에 의로운 이름으로 남는 것 후세에 칭송받는 것이 진정한 天意이다. 나는 道를 행하고 德을 쌓겠다.” 라고 하였다.

 그는 이미 而立의 나이에 공자의 말을 깨달았을까? 나는 이봉창 의사가 최소한 부귀는 잊었으며, 그 칭송을 얻기 보다는 스스로 무언가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하고자 생각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라도. 실제로 그의 의거로 전 세계가 놀라 주목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의거는, 그는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이봉창 의사뿐만 아니라 윤봉길 의사도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편지는 정말 그의 웅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강보에 쌓인 두 병정에게. 모순과 담아,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사람을 동서양 역사에서 보건대 동양으로는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으로는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되어라.”

 참으로 아련한 문장이다. 핏덩이 같고 재롱둥이 자식들을 놓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애국심을 위해 접어두었던 것이다. 특히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는 가슴을 찌르는 통곡의 문장이다.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상해, 남경 등 주요 도시가 공략 당하자 피난하며 근근이 임시정부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다 곡식 값이 싸 식량을 조달하기 쉬웠던 호남성 장사로 갔을 때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출신의 이운환이 저격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등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저격 등의 생명위협을 받으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갔다. 대나무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백범은 이러한 성질을 가진 흔히 대쪽 같은 인물이 아닐까?

 백범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미군 등과 협력하여 1945년 9월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범은 무조건 기뻐하기 보다는 국내 진공작전에 쏟았던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걱정하였다. 그는 독립 후 정국에 있어서 민족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을 미래를  이미 내다보고 걱정했던 것이다.‘만약 국내 진공작전이 시작되고 국내 진격에 성공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배웠던 은사님께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이것 이었다. 역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졌다면 현재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분단의 아픔은 없었을 텐데.

 「나의 소원」 이것이야 말로 백범 김구를 잘 나타내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유소년 기부터 명문으로서 많이 읽어보고 많이 들어본 글이다. 그의 독립을 향한 진심이 지금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가슴으로 울린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랐다. 또한 자유에 대한 정확한 명제도 제시하고 있다.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은 방종이다. 그렇기에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며, 어떠한 철학의 기초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좋은 제도들도 다시 부활시켜 온고지신으로 삼고 나라에 보탬이 될 만한 제도들을 도입해서 문화 대국이 되기를 원했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 그렇기에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 화합된 힘으로 이기심을 배척하고 국토에 춘풍이 도래하기를 빌었다.

 
 3. 맺음말
 백범은 혼란한 격동기의 시대 속에‘김창수’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 동학, 신민회, 임시정부 등 많은 경험과 많은 고난과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존경받아 마땅한 민족주의자 백범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주석,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만 전해져 오고 있다.

 백범은 백정의 白, 범부, 즉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凡을 합친 호이다. 이것은 평소 백범의 뜻인 겸허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처음 임시 정부 창립당시 스스로 도산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자청하였다.

 또한 그는 평소‘역수어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죽은 고기는 목적이 없지만 산 고기는 가는 목적이 있다. 바라건대 청년들은 물 흐르는 대로 순류하는 죽은 고기가 되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목적 있는 산 고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처음의‘겸허의 정신’과‘역수어 정신’은 백범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숭고한 인생관을 가진 이봉창 의사, 두 아들의 아버지 윤봉길 의사 등 여러 인물들과 백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백범에 대해서는 독립운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그는 다방면에서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진화의 반대되는 말은 무엇일까? 퇴화일까? 퇴화 또한 그 환경에 맞추어 나름대로의 진화가 아닐까? 나는 진화에 반대되는 말은 무 변화라 생각한다. 변화가 없는 삶은 백범이 말한 것과 같이 순류대로 따라 흘러가는‘죽은 고기’에 불과하다. 나는‘죽은 고기’인가, 목적을 가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산 고기’인가. 아직 나는 송사리다. 치어일 뿐이다.

 지식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아직 많이 미흡하고 불완전하다. 백범의 말처럼 한 번 더 지느러미를 흔들어 보려고 한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역수어’가 아니라 흐름을 바꾸는 큰‘역수어’가 되고 싶다.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석양과 함께 부대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반주를 들으니 백범의 相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은 한없이 천진난만 하면서도 세계만방을 향하여 마치“나는 내 인생을 조국에 바쳤고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았으니, 후대의 너희들도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마라”라고 소리치는 듯 한 백범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 같다.(konas)

군수사령부 종합정비창 본부중대 상병 최재원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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