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평생소원 한 분
독립기념관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광복 제67주년과 독립기념관 개관 25주년 기념행사로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독립운동가 조사에서 김구선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나 역시 한 표를 던진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김구선생이시다.
김구선생 그는 누구신가?
나 같은 민초가 감히 평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일생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친 시대적 인물이요 역사의 인물이요 선각자요 정치가요 애국자이시다.이 거목께서 직접 쓰신 백범일지의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마치 김구선생께서 직접 나타나서 이 시대 살아가는 국민의 한사람인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같이 들린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변상황은 어떠한가?
독도는 엄연히 역사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문헌적으로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한 대한민국의 영토임에도 일본은 자기 나라 땅이라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외교적 채널과 언론보도로 자국민과 세계를 호도하고 있다.
중국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여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자기의 역사로 만들고 있으며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 공산체제를 구축하고 언제든 자유평화의 대한민국을 노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때에 백범일지를 통하여 백범사상을 본받아 내 자신의 사상(思想)으로 승화시켜 애국주의 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말과 글과 행위에서 실천하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백범일지는 총 445페이지의 분량으로 크게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고 부록 같은 계속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김구선생이 52세 되던 해인 1928년 3월에 상해 임시정부청사에서 집필하여 1929년 5월에 완성한 작품으로 당시 열 살과 여섯 살밖에 안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살아온 인생 역정을 알려주고 싶은 부정(父情)의 마음을 담은 책으로 유서를 대신한 것이다.
하권은 김구선생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을 때인 1941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71세 되던 해인 1947년 6년에 걸쳐 출간한 책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김구선생의 경륜과 소회를 유언 같은 형식으로 쓴 책으로 많은 과오를 거울삼아 그와 같은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하라는 취지에서 쓴 것이다.
계속 편에 있는 <나의 소원>은 김구선생이 평소에 우리민족에게 하고픈 말씀을 적은 글이다.
상권은 김구선생의 가족내력부터 시작된다. 선생은 ‘안동김씨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이어오는 이른바 왕가(王家)의 후예이자 양반가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방계 조상이 조선시대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고자 11대 조상이 황해도 백운방의 텃골(基洞)로 이주하여 군역전(軍役田)이라는 땅에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의 부름이 있으면 언제든 군사로 나서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한 일로 낮추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국방력이 더욱 쇠약해져 김구선생이 태어나던 해인 1876년에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으로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도 하였다.지금은 그때와 달리 누구나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선택된 젊은이만이 입대하여 조국을 지키게 되는데 이는 아무나 복무할 수 없는 특별한 엘리트 코스이다. 상무(尙武)정신, 위국헌신 이것은 우리 군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이요 군인의 본분이다.
김구선생은 1876년 7월 11일에 아버지 순영과 어머니 현풍 곽 씨와 결혼하여 난산 끝에 독자로 태어났다.선생이 열두 살 때 집안 할아버지가 말총갓을 쓴 것이 양반에게 발각되어 관이 찢어지고 말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기 위해 글공부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양반의 아이들만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울 수 있기에 문중에서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와 동네 상놈아이들과 같이 배웠던 것이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 요즘 학생들은 모를 것 같다. 나 역시 김구선생에 비할 것 없지만 자녀들이 대학생이 된 요즈음도 사회적인 약자를 위하여 야간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선생은 스스로 생활실용문도 익히고 십리길 넘어있는 학골 서당에서 과거공부를 하여 16세인 1892년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치렀으나 재산과 세력 있는 사람들이 글 잘하는 사람들을 매수하여 대리시험을 치루고 본래의 과거시험은 형식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 합격할 실력이 되었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선생은 실망하여 빈부귀천 차별이 없는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인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입도하여 수천 명을 거느린 연비(連臂: 포덕 하여 얻은 신자)가 되어 동학활동을 하였으며 이 무렵 이름도 창암에서 창수(昌洙)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불렀다.
한편 전라도 고부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사람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함께 동학운동을 펼쳤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실패한 후 몽금포로 피신하였다. 열아홉 살 때 독립군 안중군의사의 부친인 동학군 토벌대 안태훈진사가 평소의 김구의 사람됨을 알고 어려움을 당할까하여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자고 제의하였다.
동학활동으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는데 살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유명학자인 고능선이라는, 고산림(高山林)이라는 분을 소개해 주었다. 고 선생은 김구에게 이 땅과 백성과 주권까지 일본한테 빼앗길 판국이기에 죽음으로써 나라에 충성하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온몸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가 정말 중요한데 선생은 구국의 지도자 고 선생이라는 분을 만나 도전받은 것이 인생의 목적을 확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896년 평안도 치하포구에서 변장한 스치다 일본중위를 칼로 쳐 죽임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해 보복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인다!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써서 길 벽에 붙이고 안악군수에게 알려주라고 동장에게 일러 주었다.
약관의 나이에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당당하게 일본군을 살해하다니! 취업과 진학 등으로 바쁜 지금의 20대와는 무엇이 다른가?
비록 시대와 환경이 제반 다르지만 정말 나라사랑 정신을 표출한 행동은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땅에 청년 김구의 의분(義奮)은 높이 평가할 만 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하여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형제까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은 석 달 후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기절하기도 여러 번 했으며 너무 힘들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심문 받는 중에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한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다’고 답변하자 옆에 있던 와타나베 일본 경찰이 통역으로 묻는 것 같아서 “이놈! “하고 큰소리로 죽을힘을 다해 호령하였다.“ 국제법상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을 맺고 그 나라 황후를 죽이라고 하더냐!”하면서 “살아서 나가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 일본 놈을 죽여 치욕을 씻을 것이다.”하니 와타나베 경찰이 두려워 피하고 말았다.
이 만큼 김구선생은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보다는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 진 것이었다. 민족역사의 면류관인 이순신 장군께서도 필생즉사(必生則死),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셨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자는 살 것이요, 살기를 각오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감옥에서 죽기를 바라는 왜놈 밑에서 죽기보다 탈옥하기로 결심하고 2년여 만에 탈옥하여 3남지역을 비롯한 전국을 유람방랑하면서 견문도 넓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더욱 구국의지(救國意志)를 불태웠다.
1904년 선생나이 28세 때 최준례라는 처녀와 결혼하여 딸 셋을 낳았으나 중간에 자식을 다 잃는 아픔이 있었으니 부모로서 자식을 가슴에 묻은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강제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한테 빼앗기는 슬픔을 당하였는데
김구선생과 애국동지들은 나라의 힘이 없어 그런 것으로 판단하여 애국 계몽운동과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양산학교 교사로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였다. 가정보다, 개인의 삶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선생의 선국우선(先國于先)의 삶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1911년 1월 테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와 105인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8번의 심문중 일곱 번 정도 고문으로 혼을 잃을 정도의 모진 고통 후 17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 일왕의 사망 등으로 감형되어 1915년 8월 가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한의 땅을 점령한 일본도 선생의 강인한 애국사상에 생명을 빼앗을 수 있어도 정신을 빼앗지 못했다.
출소하기 하기 전 선생은 왜놈으로부터 뭉우리돌 같은 조선의 독립투사로 인정하는 것이 기쁘기는 하였지만 출소 후 변절 가능성이 있기에 성결한 정신을 변치 않겠다는 표시로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공포하였다.
이후 안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농사일을 하던 중 서울에서 1919년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을 뒤덮을 무렵 혹 3·1운동 관련자로 체포될까봐 중국 상해로 망명 출국하여 막 조직되었던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청원하였는데 안창호 내무총장의 추천으로 경무국장으로 결정되었다.
1922년 어머니와 함께 먼 이국땅에서 잠시나마 온가족이 단란하게 재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지아비로서 제대로 가족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많이 느꼈을 것 같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나보고 가족을 두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기미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퇴조기를 맞아 독립청사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쇠락하여 임시정부의 명의만도 지키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규모의 항전보다는 테러(암살파괴)운동 계획을 수립하여 자금모집과 사람선발의 전권(全權)을 받아 동경사건을 주관하였다.
한일 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청년을 투사로 양성하여 일본 동경에서 천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지만 그해 윤봉길청년을 훈련시켜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왕생일 축하연에서 점심도시락 폭탄을 터뜨리어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 많은 일본군을 죽게 하였다. 이 일로 더욱 김구를 잡으려하여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조국 광복과 더불어 피신의 몸에서 살아남았다.
광복 후 27년 만에 환국의 기쁨을 맛보며 대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애석하게 돌아가셨다. 국가적으로 더 큰일을 하셔야 할 분이지만 남은 부분을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은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진정한 통일, 자주적인 통일 유업을 이어가는 것이다.
무력통일이 아닌 한 민족적인 사상, 평화적인 방법, 사랑의 행동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할 책무가 남아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평화정신으로 세계 곳곳의 분쟁의 땅에 평화정신을 심어주는 세계평화에도 앞장서는 것이 선생의 전정한 유업을 잇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선생의 애국정신과 독립정신을 본받아 최선의 노력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국가에 영광을 돌리는 성실한 삶과 이타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김구선생과 여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내걸고 수립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정통성과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주역(主役)국가로서 빛나게 된 것은 김구선생과 여러 애국지사들이 타국에서 국내에서 오직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여기고 투쟁한 결과라는 것을 우리 국민은 겸허히 인정하고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김구선생의 선국후사(先國後私)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며 나 역시 백분의 일이라도 본받아 살 것이다.(konas)
군수사 종합정비창 품검처 7급 박삼철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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