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체제 발전의 비교 : 회고와 전망
'죽은' 박정희와 김일성의 '살아있는' 영향력
1. 머리말
17∼19세기 기간 중에 구미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시민혁명·산업혁명과 그에 이은 국제질서의 변동은 정치·경제 및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인류역사의 발전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민혁명 이후에 나타난 정치적 측면에서의 공화제·민주화의 지향과 산업혁명 과정에서 제기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산업화의 역사적 과제가 그것이다.
1812년 빈(Wien)체제 수립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제국주의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동서양의 국제관계사는 모든 국가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국가간의 평화적인 공존을 이룩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로 추가하고 있다.
2012년은 남북한이 1948년에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분단체제를 지속해 온지 64주년이 되는 해였다. 분단 60여년 기간 중에 남북한의 각기 다른 정치제제가 봉착한 문제 역시 앞서 말한 자주성과 민주화, 그리고 산업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의 역사적 과제와 연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제의 수행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남북한의 두 정치지도자이다. 김일성 과 박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전인 1930∼40년 대 기간 만주지역에서 대립적인 군사활동에 종사하던 두 사람은 1961년 이후 1979년에 이르는 18년간 남북 한 지도자로서 다시 맞서게 된다.
이후 이들은 정치· 경제·대외관계 측면에서 남북한의 체제운영 방식과 각 체제의 위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침은 물론 그에 따 른 체제의 유산도 남기게 되었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1994.7.8)으로 공석이던 조선로동당의 총비서직에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을 추대한 이후에도 “0.001mm의 편차도 없는 김일성의 유훈 관철”을 정책방향으로 설정하고, 생전의 김일성이 건설한 북한식 공산주의를 견지하려는 차원에서 ‘김일성 없는 김일성의 통치’를 계속해 왔다.
또한, 김정일이 사망(2011.12.17)한 이후 권력승계와 관련하여 3대 세습자인 김정은이 할아버지인 김일성의 이미지로 북한 주민과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의 김일성의 위상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이른바 ‘박정희 증후군 (syndrome)’이라는 박정희 회고 바람이 지속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1977년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는 여러 대통령 후보들이 박정희의 경제성장 업적을 찬양하고 그의 유업계승을 다짐하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한 바 있다.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도 박정희 노선과 맥을 같이 하는 자유민주연합 정치세력과의 이른바 ‘DJP연합’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2012년 금년 제18대 대통령선거 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여권 대통령 후보로 선 출된 것과 함께 선거운동 과정에서 과거 5·16과 유신체제의 문제 등이 커다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공과를 떠나 남한 정치사에서 박정희의 비중과 영향력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남북한에는 ‘죽은’ 박정희와 김일성이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남북한 체제운영에 ‘살아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남북한의 두 지도자가 18년간에 걸친 체제경쟁에서 보여준 정치 지도력의 통치공과(統治功過)에 대해 대외적 자주성·안보지향의 측면과 정치적 민주화 및 경제부문에서의 산업화와 관련된 측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2. 자주성과 안보의 측면
김일성은 그가 벌였다는 항일 무장투쟁의 위상과 성과에 대한 각종 의문과 왜곡·과장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에서 일제 식민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민족좌파엘리트 유형이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시기에 만주지역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유격투쟁 과정을 북한 의 대외관계에서의 자주성과 민족 정통성 표방의 근거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자주성과 관련한 상대적 우위의 입장에서 대내적인 안보·군사정책과 대미·대남 정책을 수행 해 왔다. 그러나 김일성의 자주성 표방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은, 그 역시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자주성을 견지해 왔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선, 김일성이 전개했다는 항일 무장투쟁 경과의 과장·왜곡·조작으로 그 실체에 대한 신뢰성이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그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동북인민혁명군에 편입되어 있던 1932년 4월 25일에 실존이 불확실한 조선인민 혁명군을 창설했다고 하면서 오늘날의 조선인민군의 모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둘째, 그는 1930∼1940년대의 시기에 외국군으로서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과 88정찰여단에 편입 되어 일차적으로는 소련과 중공의 국가목표를 위한 군사활동에 종사했다.
셋째, 김일성은 해방을 전후해 북한지역에 대한 소련의 소비에트화정책에 의거 스탈린과 소련 점령군의 지원을 받아 집권할 수 있었다. 북한의 공산화는 러시아의 레닌이나 중국의 마오쩌뚱에 의해 추진된 토착혁명 유형이 아닌 소련에 의한 수입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넷째, 북한은 또한 김일성의 자주성 표방과는 별도로 1961년에 체결한 소련·중국과의 군사동맹과 소련· 중국으로부터의 군사 및 경제 원조에 의거해 한반도에서 북한의 안보체제를 보강할 수 있었다.
다섯째, 김일성의 대남정책에 의거한 ‘선(先)혁명·후 (後)통일론도 군사력 강화정책과 그에 따른 군비부담으로 이어져, 경제발전을 침체시키고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열세를 초래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끝으로, 김일성이 체제의 정통성으로 표방한 대외적 자주노선은 지나치게 자급자족적인 체제운영을 강조함으로써 오늘날의 북한을 국제사회로 부터 고립된 자폐적(自閉的)인 폐쇄체제로 전환시키고 개혁·개방을 저해하여 왔다.
박정희는 일제 식민체제하에서 엘리트코스인 대구사범학교와 만주 신경군관학교 그리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장교로 근무한 식민지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이 는 김일성에 비해 민족적 정통성과 자주성의 측면에서 취약점이 된다. 집권이후에도 이러한 민족적 정통성과 자주성의 취약점으로 인해 한국사회 내부에서의 반발과 북한의 대남 강경노선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집권이후 ‘선(先)경제건설·후(後)통일론’정책에 입각한 현실적이고 실리추구의 대외협력관계 속에서 북한을 능가하는 국력의 신장을 가져왔다.박정희의 개방적인 대외협력 추진은 남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보다 진전된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 일수교 과정에서의 청구권자금을 공업화를 위한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월남전 참전을 통한 ‘월남특수’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추구한 것이 그 예이다. 한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국의 핵우산 보호속에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월남전 참전 대가로 한국군 군사력 강화를 위한 원조를 보장받은 것도 그의 현실주의적 대미정책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1974년 이후 경제발전을 토대로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을 추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는 정책노선이었다.
3. 민주화의 측면
김일성은 북한지역에 노동자·농민 중심의 인민정권을 수립한 것을 항일투쟁의 자주성과 함께 체제의 정통성으로 자부했다. 남한의 박정희정권이 정통성의 결핍으로 지속적인 정치저항에 직면한데 반해 김일성의 지도체제는 외양상으로는 통합되고 안정된 모습을 보 여 왔다.
1970년의 제5차 당대회의 당규약 개정에서는 처음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당 지도이념”으로 공식화했다. 1980 년의 제6차 당대회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만을 당의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1970년의 제5차 당대회 이후 김일성 신정체제(神政體制)의 정당화를 위한 사상적 도구가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자주노선의 명분하에 폐쇄체제를 유지하는 합리화의 준거로 전변되었다. 주체의 결정자는 김일성과 극소수의 지배층으로 한정되었다. 수령과 당이 영도한다는 일당독재와 수령론은 김일성에 대한 극도의 개인숭배·우상화와 연계되었다.
김일성은 수령에 대한 무조건성·절대성의 신격성을 갖는 전체주의적 지도자(totalitarian leader)의 극단적인 유형이 되었다. 이러한 지도체제는 북한주민을 동원체제의 구성원으로 삼아 사회주의적 신민형(臣民型) 정치문화를 강요함으로써 북한사회의 민주화에 제약 을 가하는 환경요인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대통령선거를 통한 민정이양 이후에도 계속해서 집권 과정상의 정통성 결핍과 관련해서 정치적 저항과 도전을 받았다. 정권존립의 위기에 직면하여 박정희는 군부를 정치적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군은 집권기간 내내 박정희 권위주의 독재체제의 지속을 위한 정치 안정화의 수단으로 동 원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쿠데타에 의한 비합헌적 탈권과 군부 권위주의 독재체제의 유지는 명백히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4. 산업화 측면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침체의 시기였다. 반면 김일성은 정치적 지지의 기반하에 산업화를 추구할 수 있었으므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북한지역의 공업 시설도 산업화에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가운데 김일성은 사회주의 통제경제체제에 의거해 급속한 사회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다. 구체적으로는 1947년의 제 1차 1개년계획으로부터 그의 경쟁자인 박정희가 생존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제 2차 7 개년계획(1978∼1984년)까지 추진 중이었다.
이 과정에 서 1960년대까지는 경제성장 수준에서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속성이 갖는 생산력 발전의 한계와 김일성 주도하에 수립한 자폐적인 자립경제 노선의 원칙이 북한경제를 침체시키는 원 인이 되었다.
김일성이 북한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자력갱생 원칙의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은 국제경제에 대한 폐쇄성으로 인해 경제성장의 최대 제약요인이 되었다. 중공업 우선정책도 산업부문간의 불균형 심화와 경공업·농업·사회간접자본 시설의 낙후를 가져왔다. 1962 년부터 추진한 군사·경제 병진정책도 군사비의 과중 부담으로 경제침체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김일성의 ‘선(先)혁명·후(後)통일론’에 의한 군사·경제 병진정책 추진은 ‘선(先)경제건설·후(後)통일론’에 의거해 경제성장에 주력해 온 박정희의 전략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김일성과 비교해 불리한 상황 여건에서 산업화를 추진했다. 그가 집권했던 1961년의 한국경제는 1차산업에 머무르는 가운데 2차산업인 공업기반은 취약했다. 여기서 덧붙여 대중의 지지를 창출할 수 있는 민족적 정통성이나 정치적 정당성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는 그의 집권기간에 김일성과의 산업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 주요한 승리의 한 요인은 당시 한국사회 내부에서 군대가 가지고 있던 선진성에 있었다. 파이(Lucian W. Pye)는 신생국 군대가 근대화의 대행자로서 경제발전 등을 담당할 수 있는 근대화된 조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1961년 집권 이후 박정희가 수행한 급속한 산업화 추진정책은 집권 이전에 한국 군부가 보유한 발전주의 정향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 군부의 발전정향은 일본과 미국의 근대화 모형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군은 한국사회 내 의 최첨단 기술·장비를 보유한 최선진 부문으로서 경제발전에 필요한 각 분야의 기술인력을 사회에 배출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주도에 의한 권위주의적 산업화·개발독재 방식은 괄목할 만한 경제의 양적 성장을 성취했다. 군사정권 출범 이후 추진된 경제성장 우선정책은 박정희 집권기간이었던 1962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약 9%의 고도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1인당 국민소득 (GNP)도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에는 1,644달러로 18배의 상승률을 보이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출주도 성장전략과 국가주도 산업화를 내용으로 하는 외연적 산업화 정책은 경제의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국가주도 산업화 정책에 의해 한국사회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는 중산층이 형성되어 민주화의 사회적 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반면 경제의 질적 성장개념이 경시됨으로써 한국사회 내부에는 이기주의적인 황금만능주의·배금주의·물신주의적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경제정의와 도덕성이 결여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정경유착 등 천민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경제성장 과정의 부산물로 나타난 소득격차와 지역·계층간의 불균형은 사회갈등을 야기해 사회통합의 저해 요인이 되기도 했다.
5. 맺음말
분단 60 여년 기간중 남북한의 각기 다른 정치체제가 봉착 하였던 문제는 자주성과 민주화, 그리고 산업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의 역사적 과제와 연계된 것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과제의 수행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박정희와 김일성의 정치지도력이다.
이들은 1961∼1979년까지 18년간 남북한의 최고통치자로서 남북한 체제발전과 관 련한 경쟁의 주 도 자 였 기 때문이다.
자주성의 측면에서 김일성은 식민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좌파엘리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주성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선(先)혁명·후(後)통일론에 입각한 군사력 강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북한의 경제력 침체에 의한 국력의 쇠퇴를 초래했다. 또한 자급자족적 체제 의 지나친 강조는 북한을 대외적으로 자폐적인 폐쇄 체제로 전환시켰다.
박정희는 식민엘리트의 경력과 쿠데타에 의한 집권으로 민족적·정치적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이후 현실주의적이고 실리추구의 대외협력관계 속에서 국력의 신장을 추구하였다. 두 지도자가 가졌던 과거 경력의 유·불리 위치가 전변(轉變)된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 측면에서, 김일성은 인민정권을 표방 하면서도 주체사상과 수령론을 통하여 북한을 전체주의 일인 독재의 신정체제(神政體制)로 퇴행시켰다. 박정희에 의한 군부권위주의 독재 역시 남한의 민주화에는 기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자력으로 민간·군부 독재체제를 모두 극복하고 오늘날 전세계가 찬탄하는 민주화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산업화 측면에서는 두 정치지도자가 각각 급속한 사회주의적·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다.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목표로 하여 군사력 강화의 노선을 채택한 김일성은 국가발전전략 선택의 차이로 박정희의 경제성장 우선주의에 패배하였다. 박정희의 경제성 장 정책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북한을 제압하였고, 한국사회 내부에 중간층 형성을 가져와 민주화를 촉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두 정치지도자가 자주성과 민주화·산업화의 추진이라는 역사적 과제의 수행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지도력의 공과(功過)는 분단된 민족공동체의 통합을 이루어야 할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konas)출처:월간충호
양병기 (청주대 교수·한국정치학회 고문)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