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을 용서·화해·상생의 상징으로 승화하자
제주시 봉개동에는 2001년부터 993억원을 투자하여 약 12만여 평에 제주4·3평화공원을 3단계로 조성해 왔으며 금년(2008년)에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곳을 평화공원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4·3사건 당시 희생당한 원한의 영혼들을 가해자, 피해자 모두를 아울러 용서, 화해하여 갈등을 상생과 평화로 승화시키자는 의미 같다. 이곳에는 '4·3위령제단', '제주4·3평화기념관' 그리고 '4·3문화관'과 4·3위령탑 등 각종 조형물들이 축조되어 있다.
4·3위령제단 위패봉안소에는 4·3사건 희생자 13,564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제단 앞 광장에서는 2000년도부터 매년 '제주4·3사건희생자 범도민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위패봉안소에는 4·3사건 당시 토벌대로 참가하여 희생당한 군·경의 위패는 봉안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평화공원의 이미지를 무색케 하는 아쉬움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봉안된 위패 중에는 다수의 남로당요원과 이에 적극 가담한 폭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단을 내려오다 보면 우측에 지하1층 지상3층의 거대한 접시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제주4·3평화기념관이다. 제주4·3사건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사료를 전시한 곳으로 지난 3월 28일 공식 개관했다.
금년 4월 3일 이곳 위령제단 광장에서 제60주년 범도민 위령제 행사가 열렸을 때 제주도지사는 '주제사' 도중에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독일정부 학정으로 희생당한 유태인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폴란드 유태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전 정부에서 국가수반 자격으로 제주4·3에 대하여 공식 사과를 표명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제주4·3을 이념 갈등으로 이끌어 가려는 일부의 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질책성 항의메시지를 누구에겐가 보냈다.
아마도 제주4·3평화기념관의 사료전시 내용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관계 기관 요로에 개관 연기를 주장해온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국정협)'라는 시민단체를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왜 이렇게 동일한 사건에 대해 상반된 시각이 있는지 안타깝다.
제주4·3사건 재조명
제주4·3사건은 생을 달리한 희생자의 유족들과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신원과 명예회복을 위한 진상규명 노력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진상규명 운동이 정치적 이유로 억눌러져 오다가 1980년도에 발생한 5·18광주사태가 1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정치 상황의 변화로 재조명되자 4·3사건도 양지로 나왔다.
2000년 1월 12일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특별법 제정 취지를 제1조(목적)에 "이 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제주4·3사건은 합법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정부는 특별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라고 한다)'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이하 "기획단"이라고 한다)'을 설치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 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하고 분석하여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조사보고서)』를 확정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 『조사보고서』에는 사건의 객관적 진상조사 보다는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초점을 두고 사료를 분석하고 취합한 흔적이 엿보인다. 따라서 많은 부분에서 사실이 과장되고 은폐 및 날조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이로 인해 특별법 입법 취지인 국민화합이 아닌 새로운 국민간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를 열거해 보겠다.
제주4·3사건 발생 배경
연합국의 제2차세계대전 승리로 한반도에 찾아온 해방 공간에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 적화를 위한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46년 대구10·1폭동, 47년도의 곳곳의 파업과 테러, 48년 제주4·3사건과 여순10·19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였다. 특히 제주도는 일본이 항복한 이후부터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한달 반 이상 동안 치안 공백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를 틈탄 좌익계열 사람들의 선전선동으로 제주도는 좌익계가 우익계를 압도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도 허용하는 정책을 펴다가 좌익들의 테러가 점증하자 자유민주주의체제 이식을 위한 노력과 치안 유지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미한 정국에서 UN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제시하였다가 한반도가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극심한 정국 혼란을 야기하자 신탁통치 계획을 철회하고 1947년 11월 14일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UN감시단이 1948년 1월 8일 입북하려 했으나 38도 선상에서 저지당하자 UN은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하도록 수정 결의하였다.
이에 좌익세력들이 단선단정(單選單政) 반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남한의 5·10총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공권력을 무력화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새벽 2시 한라산 오름에서 올린 횃불을 신호로 12개의 경찰지서를 기습공격하고, 잘 훈련된 인민유격대원 350명을 투입하여 경찰관과 선거관리위원 및 우익 청년단 등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제주4·3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러한 성공적인 기습작전의 전과를 확대하여 남한 9개도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구가 과반수가 미달되는 5·10선거를 무효화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부의 보고서(Hq. USAFIK. G-2 Periodic Reporte. No. 752. February 6. 1948)에 "경찰이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 불법 회의장을 급습하여 노획한 문서에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 그리고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가 적혀있었다."라고 기술하였다. 4·3사건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는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朴甲東씨가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글'을 통해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증언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또한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가 4월 3일 작전을 개시하면서 뿌렸던 제주도미에게 보내는 호소문에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라고 적시하여 상기 자료에 대한 신뢰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이 5·10선거를 저지할 목적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에 지시하여 일으킨 폭동'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조사보고서』(165쪽)에는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1947년 3·1절 발포사건(제주도민들이 3·1절 기념행사 후 불법시위를 하여 이를 통제하던 경찰 발포로 시민 6명이 사망한 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북청년회와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 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이라고 기술하였다. 외부 세력의 개입 없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켰고 양민들이 미군정의 강압에 저항하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단 연구진은 앞서 언급한 주한민군본부 보고서를 입증되지 않는 추론을 근거로 '경찰이 조작한 허구적인 것'이라고 뒤집고, 박갑동씨의 기고문 내용도 『조사보고서』작성 연구원들이 일본 현지에서 박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열거하면서 '남로당본부의 지령' 설은 조작이라고 결론 내렸다. 4·3사건은 남로당과는 무관한 제주도민의 자생적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제주4·3의 비극과 평화기념관
4·3사건은 남로당 폭도들이 제주도가 지닌 혈연, 지연 그리고 자연 환경 등 특이한 정서를 이용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그들의 목적에 끌어드리면서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낮에는 토벌대가 마을을 장악해 폭도 혐의자라 하여 총살하고, 토벌대가 물러간 밤에는 폭도가 들이닥쳐 반동분자라 하여 숙청'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1948년과 1949년을 정점으로 7년여 동안 지속된 토벌대와 저항 세력 간 전투에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극이 곳곳에서 속출하였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간에 발생한 극한 대립의 산물이었으며 승리와 패배 밖에 없는 전투 속성이 비극을 더욱 양산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아픈 상흔을 재현하여 또다시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고,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고 피해자와 후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 모두가 화해와 용서로 거듭나는 교육장으로 삼자는 것이 평화기념관 건립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깊게 하는 갈등의 기념관이 될 것 같아 안타깝다.
필자는 3월 초 『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기획 및 전시를 했다는 개관 준비가 다된 제주4·3평화기념관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전시관을 2시간 여 둘러보고 난 뒤의 나의 가슴은 무엇인지 모를 충격에 떨렸고, 머리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하였다.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한 부끄럽고 불행한 역사,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나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친북 좌익 학자가 주장한 대한민국 현대사 총평 바로 그것이었다. 왜일까. 사료들이 그렇게 느끼도록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사료들은 어떤 의도에 맞도록 사실을 왜곡하면서 감성을 자극하도록 기획된 것 같았다. 그 대표적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동굴'이라고 이름 붙여진 제1전시관에는 1948년에 발생한 4·3사건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와는 별개의 사건인 1947년의 3·1절 기념행사시 발생한 제주시 관덕정 앞의 경찰발포 사건을 확대 전시해 놓고 이것이 4·3사건의 도화선이라고 전시하였다. 4·3사건의 직접적 도화선이었던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의 경찰지서 습격사건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큰 논란이 있는 4·3사건 원인을 이상한 잣대로 재단해 놓았다.
제2관 '흔들리는 섬'에서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강했으면서도 온건한 항일투쟁 활동가가 주도하여 친일파를 배제하고 대중지지 받았다."고 미화한 반면, 미군정은 "일장기 내린 자리에 펄럭이는 성조기, 전승군으로 조선지역 점령"이라고 소개하면서 미군 계급장에 일본군 모자를 쓴 거만한 기마경찰이 시위 군중을 노려보는 대형 그림을 걸어 놓았다. 배타적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미군을 일군과 비슷한 오만한 침략자로 묘사한 것이다.
제3관 '바람타는 섬'에서는 폭동의 목적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것보다는 '경찰이 제주도민을 고문과 억압으로 탄압하자 이에 저항하여 조국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한 봉기가 목적이었다'고 하여 불의에 대한 의거쯤으로 왜곡하였다.
제4관 '불타는 섬'에서는 비극의 현장을 소개하면서 군경의 진압작전을 초토화작전이라고 단정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살인 만행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다며, 이승만이 등장한 사진과 함께 학살을 연상하게 하는 총살 장면이 담긴 대형 그림을 함께 배치해 놓아 이승만 지령에 따른 학살로 이해하게 하였다. 폭도는 정의의 편에 세우고 이승만 대통령은 학살자의 괴수쯤으로 세워 놓고 대한민국을 부도덕한 악마 집단으로 폄하한 것이다. 이러한 전시관을 둘러 본 국민 누가 국가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을 간직할 수가 있겠는가.
사시의 잣대로 4·3사건을 정리한 불순한 목적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의 학살 만행은 은폐·미화하고, 폭도 토벌과정에서 발생한 주민들의 희생 장면을 전시장에 가득히 도배하여 관람자들을 토벌군은 몹쓸 도당으로 인식케 하려는 그들의 지향점으로 인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가릴 수 없는 것, 제주4·3평화기념관은 사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사료를 전시할 때 갈등을 넘어 평화를 지향하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이처럼 평화전시관이 왜곡전시관이 된 것은 전시물 기획 근거가 된 『조사보고서』에 원론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조사보고서』가 왜곡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4·3사건의 진상조사기획단과 이를 공론화하고 검증하는 특위위원회의 구성이 좌파적 시각과 친북적 성향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상기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폭동에 맞서 합법적 법집행을 한 군과 경찰은 '학살자'가 되고, 폭도들은 폭압적 공권력에 의롭게 항거한 '봉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을 부정하고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나라로 왜곡하는 작태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제57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 때 한 여고생이 남긴 추모사 중 "소 먹이러 산에 갔다가 폭도들에게 희생된 6촌, 4·3이 끝난 뒤에 육지 형무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초로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온 말없는 4촌,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안 되어 어렵게 살아가는 또 다른 6촌" 이라는 글은 국민 모두를 공감케 하는 4·3사건의 진실과 후유증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제주도민의 아픈 상처를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픔을 용서·화해·화합으로 치유하고 인권이 보장되고 평화가 깃드는 평화의 섬 제주도를 일구려는 제주도민들의 소망을 진정으로 성원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사업이 특정는 목적이나 포퓰리즘적 대중 영합을 위한 용도로 진행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어느 4·3관련 학술토론회에서 4·3사건 성격을 "제주도민의 역사적 별국(別國) 의식"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존립을 위한 저항"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지나친 사고의 비약도 제주도민 스스로가 경계해야 한다. 잘못하면 제주도민을 고립시키고 경외감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이 이념적 갈등으로 분단된지 60년이 지난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폭력까지 동원하면서 그토록 선전 선동했던 낙원은 굶주림과 인권이 말살된 세계 초유의 왕조적 독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저들이 그토록 저주하던 대한민국은 제주4·3사건과 같은 엄청난 산고를 겪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세계가 칭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정의가 패배한 부끄럽고 불행한 나라가 아닌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웅변하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조국이 된 것이다.
4·3평화기념관은 편향된 이념의 포장을 걷어내고 사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한 사료 전시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이곳을 견학하고 나오면 조국에 대한 저주와 부끄러움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만난을 무릅쓰고 이를 가꾸어 온 호국 영령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동시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에게 신원과 위로를 보내고 화합과 상생의 상징이 되도록 해야 한다.(konas)
김규(재향군인회 호국안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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