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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으로 실추된 國軍의 명예 회복하자

북의 한국군 와해공작과 軍-民 이간을 위한 모략전에 대한 대응책, 국군이 나서라!

Written by. 지만원   입력 : 2008-11-03 오전 8: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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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법무관 7명의 항명은 군와해 행위

지난 7월말 경, 국방장관이 23권의 책을 볼온서적으로 지정한 데 대해 10월 하순 7명의 군법무관들이 군의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군인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 등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냈고, 이어서 성공회대 역사학 교수인 한홍구 등 11명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군을 상대로 “군의 금서조치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고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을 행하는 행위이며 저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습니다.

국방장관은 군 병력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수호하야 하며 그 첫째 임무가 전투력 강화인 것입니다. 불온서적 23권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판단된 서적들이며, 이를 차단시키는 것은 국방장관의 임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국가보위와 군인 개개인의 행복추구권, 이 두 개중 어느 것이 상위이겠습니까? 삼척동자도 국가보위가 먼저라 할 것입니다.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내무생활 자체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요, 계급 시스템 자체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들의 궁극적인 주장은 군이 해체돼야 한다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런 행위에 의해 군은 일반 국민에 시대착오적인 외골수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항명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들이 군 와해 세력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군에 침투해 있을 좌익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조치를 취하는 큰 계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정권이 저지른 한국군 와해작전

지난 10년은 좌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 곳곳을 장악했던 시대였음을 부정할 국민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2001년의 일이었습니다. 기무사가 1년여에 걸쳐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자료를 작성한 바 있었습니다. 군내 좌익 세력이 1,000명이 넘고,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까지 김정일 추종세력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강창성 의원 국정감사). 조성태 장관은 이 보고서를 전군 지휘관들에게 배포하라고 지시했지만 갑자기 조성태 장관이 해임되고 김동신 장군이 장관이 되었습니다. 김동신 장관은 그 자료를 작성한 기무사 대공처장(염준장)을 해외출장 중인 2001년 6월 30일에 갑자기 전역시켰습니다(월간조선 2001.8월호 심층취재 특종). 일용직도 아닌 장군, 더구나 간첩 잡는 일에 열심이었던 장군을 비상시기도 아닌데 해외출장 중 갑자기 전역시킨 일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해괴한 처사였습니다.

당시 김동신 장관이 취한 행위들은 안보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에 많은 심려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8월 22일 김동신 당시 예비역 중장은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갈 때에 임진각에까지 가서 꽃다발을 건넨 바 있습니다"(민원 회신에서도 본인 인정). 그가 장관이었던 당시인 2001 년 3월 22일자 국방일보 9면에는 북한의 피바다를 대대적으로 선전돼 있었습니다. 북한의 피바다를 극찬한 국방일보에 대해 기무사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기초자료 조사에 착수하다가 군수뇌 분위기에 눌려 수사를 그만 둔 적이 있었습니다(주간조선 2001.4.25). 그는 또 "여순반란 사건에서 좌익 반란군을 정당화 및 미화시킨 영화 "애기섬" 제작에 트럭, 헬기, 소총, 군복 등을 지원한 바 있었습니다(2조선일보 2001.9.18.). 그는 주적개념을 국방백서에 넣을 수 없다며 해마다 발간해 오던 국방백서 발간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2002.5.24 일간지).

              김대중의 군 와해행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1999년 6.15 연평해전 당시에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합참의 누군가가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정됐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 교전규칙을 뒤엎은 것이었으며, 현장지휘관의 재량권을 통째로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첫째, 북한선박으로부터 소총 유효사거리인 450m-500m 떨어진 곳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됩니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은 아예 얼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규칙은 200∼500m 사이의 공간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른바 5단계 교전 절차로 첫째 경고방송을 하고, 둘째 450m에 까지 근접하여 시위기동을 하고, 셋째, 200m-500 정도로까지 다가가 차단기동을 하고 넷째 200m-500m 정도까지 다가가서 경고사격을 가하고, 다섯째 격파사격을 가한다는 것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29일 당시에는 바로 이 제2단계 수칙을 수행하다가 비참하게 테러를 당했던 것입니다. 교전규칙은 처음부터 맞아죽으라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전규칙은 1999년6월15일 연평해전에서도 강요됐던 교전 룰이었습니다. 그런데 1999년에는 어째서 대승을 거두었고, 2002년에는 당했습니까?  1999년에는 제2함대 사령관인 박정성 제독의 과감성과 조성태 국방장관의 배후 지원 덕분에 손발을 묶은 위 교전규칙을 거의 무시했기 때문에 대승했고, 그 결과 그는 조용한 곳으로 좌천되어 군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연평해전에서 해군이 대승을 이루자 김대중은 2함대 사령관을 내보내는 것으로 군에 좌익분위기를 형성한 데 이어 군에 “4대 교전 수칙”을 하달했습니다. 1) ‘북방한계선을 지킬 것’ 2)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 3)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 것’ 4)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 것’이었습니다.
 
이 4대 규칙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장병들이 즉각적인 위협을 감지하더라도 적의 선제공격이 있기 전엔 먼저 공격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고, 지휘관들에는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김대중이 내린 4대 교전 수칙은 우리 해군의 손발을 완전히 묶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02년 6월 29일에는 우리가 북한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 현대식 무기를 가지고도 일방적으로 당한데다가 김대중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겁을 먹고 북으로 도망하는 적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친북 좌파 세력이 한국군을 지휘하면서 한국군을 파괴해 왔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합참은 며칠 후인 7월 2일 위 5단계 대응을 3단계로 단순화하는 내용으로 바꾸었습니다. 200m, 500m까지 접근하라는 내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2004년 6월, 노무현에 의해 변질됐습니다. 2004년 6월 남북장성급회담의 합의에 따라 합참은 작전예규에 ‘경고통신’ 단계를 하나 더 포함시킨 것입니다. 상호 통신 후에 실력행사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노무현의 군 와해행위

노무현은 한국군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대한민국 안보의 보루인 한미연합사를 전격 해체했습니다. 2006년 12월 21일, 그는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군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軍비하발언을 했습니다: 2006.12.21 “젊은이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 “군은 그 많은 국방비를 다 떡 사먹었는가?”
 
“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 했나. 심심하면 사람들한테 세금 내라 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그 위의 사람들은 뭐 했나. 자기 나라, 자기 군대의 작전 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그런 것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한국군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을 때 북한과 우리가 대화하거나, 중국과 우리가 대화하거나 그래도 한국이 말(힘이) 좀 있지 않겠냐. 전시작전권도 없는 사람이 민간 시설에 폭격할 것인지 아닌지, 그것도 마음대로 결정 못하는 나라가 그 판에 중국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북한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명색이 국방부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미국에만 매달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껌딩이, 미국 껌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노무현 시절에 국방장관을 맡았던 윤광웅 중장은 대한민국 안보의 제1자산인 한미연합사를 해체한 사람입니다. 그는 2006년 8월 17일, 국회국방위에서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이인제와의 논쟁에서).  1) "연합체제는 주권 침해다."  2) “연합사는 북한과의 평화협정이나 군축을 위해 해체할 필요가 있다.” 3) “연합체제는 자주국방이 아니다.” 그는 또한 2005년 2월 발간된 국방백서에서 ‘주적’개념을 삭제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단적인 몇 개의 사항만 나열했습니다만 이는 지난 10년 동안 군이 얼마나 파괴되었으며 군에 얼마나 많은 좌익들이 침투해 활약하고 있을까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은 숙군 작업 벌여야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겠습니다. 1948년4월3일에 제주도에서 빨치산에 의한 무장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이어서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 등의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군 내부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긴장했겠는가? 남과 북에서 협공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부는 전군적으로 숙군작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시켰습니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습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전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습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1948년 12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6.25직전에 이르기까지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하여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는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습니다.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했고, 6.25 발발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 급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단행되어 모두가 낯선 지형에서 낯선 병사를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6.월13일에서 6월 20일 사이에 전후방부대가 모두 부대이동을 실시하였습니다. 6월 11일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월 24일 0시에 해제됨과 동시에 육본은 전 장병의 50%에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습니다.

6월24일 오후부터 6월25일 새벽까지 중령급 이상의 전후방 장교들이 대거 부대를 떠나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를 열면서 만취했습니다. 국군이 퇴각하고 있는데도 우리 방송은 6.25-27일 사이에 국군이 북진중이라고 허위 방송을 함으로써 군부와 국민을 혼란시키고 애국자들이 피난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서둘러 한강교를 폭파했고, 폭파 임무를 수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서둘러 사형시켰습니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하여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 작업을 단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데 지난 10년간 군에 암약해온 좌익들을 이대로 방치한 채로 전쟁을 맞는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경각심을 가지고 군 내부에 잠입한 좌익들과의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국방군을 와해하라, 김일성 교시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 2003년 1월호가 김정일의 극비 지령 문서인 ‘학습제강’을 어렵게 획득하여 게재했습니다[02年 北朝鮮[南進]文書(タレバンの轍を踏むな - 金正日の最新極秘指令)文藝春秋 (03年1月號)]

이 중에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적군 와해공작은 전쟁승리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다. 대포를 쏘고 총을 쏘는 것만으로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와해공작을 강화하는 것 이야말로 적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적의 무장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서 적을 타격 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총공격을 감행했을 때의 일이다. 남베트남 괴뢰군이 수세에 몰리고 있던 절호의 기회를 틈타 북베트남 인민군은, 이전에 전리품으로 빼앗은 미제 침략군의 비행기 6대를 가지고 어느 날 티우 대통령 궁전에의 폭격을 조직하였다. 그러자 궁전에 모여 미 대통령 특사 놈 하고 이런저런 대책을 협의하고 있던 괴뢰군 두목 놈은 자기편 공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소스라치게 놀랐고, 미제 특사 놈은 서둘러  현지 미국인들에 대해  바다에 대기하고 있는 군함으로 피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제와 베트남 괴뢰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 일은 남베트남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월남이 이렇게 해서 망했다는 것은 저 역시 이 ‘학습제강’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공산군이란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인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최근 저는 김일성의 비밀교시라는 것을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산케이(産經)신문이 2004년6월 22-27일 사이 5회에 걸쳐 연재했고, 2003년10월, 동북아연구소 역시 “김일성 비밀교시"라는 제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 개의 비밀교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계시는 비극적 아웅산 만행이 1983년10월 9일에 자행되어 대한민국 각료 전체가 일거에 희생되었습니다. 17명이 그 자리에서 순직했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미얀마정부는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한 후 다음해인 1984년 10월 국제연합에 아웅산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미얀마 정부가 이 2명을 잡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구로부터 당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일성 교시를 읽어보니 이 사건은 김일성이 사건 1개월 전인 1983년 9월 에 지시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조선의 대통령이 각료들을 이끌고 동남아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부에서 결사대를 파견해 보겠다고 했다는데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틀림없이 해야 합니다. 버-마가 허술한 나라라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방문 일정에 따라 사전 답사도 해 보고 빈틈없이 잘 준비를 해서 감쪽같이 해 치워야 합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성공하게만 된다면 결정적 시기가 성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큰 사건에는 김일성의 무서운 지령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980년 5월의 폭동도 김일성 교시로 판단

김일성의 비밀교시를 보면 김일성은 10.26 직후인 1979년 11월에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국에 걸쳐 이른바 ‘전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를 한 것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79년 12월20일에는 12.12를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라고 정의하면서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1980년 4월 21일, 사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사북사태를 전민항쟁으로 확대하라”는 비밀교시를 내린 것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거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김일성은 1979년 11월부터 1980년 4월에 걸쳐 남한에 전민적인 봉기를 일으키라 지시했고, 한 달 후인 5월 3일부터 남한에는 무서운 속도로 폭력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5월15일에는 서울역에서 10만 이상의 학생 시위대가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등 폭력을 행사했고, 급기야는 내무장관은 치안을 계엄군에 맡아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광주 5.18 폭력 시위는 바로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일성 교사와 남한에서 전개되는 상황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보이는 것입니다. 거물 간첩으로 귀순한 김용규 선생은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386 주사파의 핵심 교관이었던 현 프리존뉴스의 사장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불만을 부추겨 민란으로 확대하라는 것이 북의 전략이다. 돌이켜 볼 때, 1970 및 19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갖가지 극렬사태가 바로 북쪽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도, 재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망명한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의 240쪽에는 “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구태여 강명도씨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이 책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5.18은 북한의 작전인데, 실패한 작전이었다!”, 북한에선 상식

지난 2006년 12월 20일, 탈북 북한군인 출신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세실레스토랑에서 5.18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대규모로 내려왔다는 증언을 기자회견 형식으로 자세하게 했습니다. 이분들은 광주사태의 당사자들도 아니고, 이해관계를 가진 분들도 아니며, 여러 가지 진술내용과 사진들을 볼 때에 군에 오랜 동안 몸을 담고 있었던 제게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면 남한에서의 거의 모든 소요는 전문적인 공작수법을 훈련받은 고첩들과 전문 폭동기술을 가진 남파 세력들 그리고 자생 불순세력들이 연합하여 불을 지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악성유언비어 살포-거짓선동-파괴 방화 살인을 내용으로 하는 폭력행위, 뒤집어씌우는 모략행위, 집단적 억지주장. 역사왜곡에 이르는 일연의 과정들에는 반드시 작전 세력이 있다는 것이 제 솔직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 학습하는 것은 특히 군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강조돼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 격하운동은 북의 모략전

북한의 불법집단은 한국군을 와해시키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작전을 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군 내부에 빨치산 군인들을 양성하여 군의 기강과 정신을 파괴하는 작전이고 다른 하나는 군과 민을 이간시켜 군을 형편없는 야수집단으로 매도하는 작전인 것입니다. 국가안보는 군과 민이 하나가 되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군은 고기요 민은 물이라는 모택동 전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는 상식인 것입니다.

전쟁 시에 민간의 제보가 없으면 군은 어두운 정보를 가지고 전쟁을 하게 되고, 평시에 민간인 제보가 없으면 우리는 간첩을 잡지 못합니다. 군과 민을 이간시키는 것은 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군과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여론을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한국군을 살입집단으로 비하시켜 민간으로부터 외면당하게 하고, 장차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 군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군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목표에 따라 저들은 특히 지난 10년간 한국을 지키는 한국군과 미군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에 주력해 왔고, 그 결과 대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에서 모략당한 한국군

1995년과 96년에 걸쳐 한국의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공수특전단이 광주에서 무고한 양민을 마구 살해하고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학살집단으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군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을 받고 광주로 내려갔고, 광주로 내려간 공수부대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는 7공 여단으로 600명 수준에 불과했으며, 전국적으로 배치된 계엄군 숫자 중에서 가장 적은 수자였으며, 특히 이 7공수 여단은 그 40%가 호남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80년 당시 폭력시위의 주체였던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해 광주로 파견되어 1개 대대는 전남대에 또 다른 1개 대대는 조선대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계엄군에게 먼저 물리적 공격을 가한 쪽은 학생들이었습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 조사에 의하면 마이크를 잡고 귀가를 종용하는 계엄군에게 집단으로 돌을 던져 7명의 계엄군에게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7명의 전우들이 돌팔매질을 당해 피를 흘리는 것을 본 전우들이 학생들을 가만 둘리 없었고, 그래서 진압봉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1995년 검찰 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지고 수십 명의 경찰을 인질로 잡고 수십 개의 파출소와 방송국 그리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경상도 차량을 불태우고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 구타하여 살해하고, 계엄군을 향해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굴리고 계엄군을 향해 탈취한 군장갑차와 대형차량을 돌진시켜 병사들을 깔아죽이고, 방위산업 업체에서 350여 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탈취하고, 그것을 가지고 수십 개의 무기고를 털어 2개 연대 규모의 무장에 해당하는 무기를 탈취하고 그 무기를 가지고 계엄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목진지를 점령하여 동시다발적인 매복 작전을 수행하고, 2,700명 정도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공격하였고, 고립된 병사들을 난자하여 살해하였습니다.

80만 광주시민 중에서 10만 이상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민들을 분노케 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비상식적인 유언비어였습니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들만 뽑아 호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호남사람의 70% 정도를 죽이려고 병사들에게 환각제를 먹여 투입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호남 여인들을 욕보이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등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유언비어에 광주 시민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합지만 이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유언비어를 퍼트린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아닐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거물급 탈북자 강명도씨는 평양 특수부대에서 내려와 유언비어를 만들어 뿌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무서운 심리전이요 모략전인 것입니다. 심리전 훈련을 많이 받은 특전부대는 광주에서 생명을 바쳐 국가를 수호했지만 민주화 세력의 득세에 의해 역적의 군대요 살인집단으로 매도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모략전의 전형이지만 지금까지고 우린 군과 민은 그 모략전에 완전히 속아 모략을 사실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군 최고의 정예부대라는 공수부대가 상종못할 야수집단이 됐습니다. 이런 군대에 전쟁이 나면 과연 일반 국민들이 협조를 하겠습니까? 광주에서는 신부와 시민이 배고픈 계엄군 병사들이 라면 하나 끓여달라 하니까 문을 닫아 버렸다 합니다.               
  
            주월 한국군도 몸서리쳐지는 양만학살 집단으로 모략

광주에 간 군인들만 살인집단으로 매도?것이 아닙니다. 1960년-70년대를 걸쳐 무더운 나라 월남에까지 가서 공산주의와 싸운 32만 5천명의 파월용사들도 ‘몸서리 쳐지는 살인집단’으로 매도되었습니다. 1999년 가을, 한겨레21은 이름도 없는 베트남 유학생 구수정이라는 여인이 쓴 가공 소설을 진실인양 보도하면서 주월한국군 전체를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고 매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파월장병들은 가족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 왔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트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어 던져 넣었다", "여성들은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가지 군화발로 짓밟았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 시켰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 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는 듯 하다", "어린이, 임산부, 70세 이상의 노인까지 50명을 한곳에 몰아넣고 죽였다". "주민을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 주민들을 한 집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후 죽은 자와 산 자를 통 채로 불태운다".(한겨레21 1999.5.6일자).

그녀의 이와 같이 허무맹랑한 악의적 소설에 강정구, 한홍구, 고경태기자가 매달려 거짓말을 더욱 부풀렸습니다. 32만5천의 파월장병들은 이 한 여인의 말장난에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남편,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파월장병들이 정말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까? 파월장병들의 용맹성과 예의 바른 행동으로 한국은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월남특수와 중동특수를 개척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것입니다. 파월장병들이 살인집단이 아닌 것처럼 광주에 갔던 공수부대원들도 살인집단이 아닌 것입니다. 

               주한미군은 노근리에서 살인 집단으로 모략

저들은 한국군만 살인집단으로 매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도 살인집단이요 범죄집단인 것으로 매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월장병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하던 바로 그 시기인 1999년 9월, 저들은 느닷없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자극적인 이슈로 부각시켰습니다. 미군이 노근리 주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 총을 쏘아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그 결과 상당한 국민이 반미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노근리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미군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역사공원으로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미군은 저들의 주장대로 살인집단이었습니까? 일본에서 폭우를 뚫고 부산으로 날아온 스미스 부대와 24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고,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습니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째가 되던 8.25. 북괴에 포로가 됐고, 평소 체중 86kg가 체포됐을 때에는 58kg였습니다.

일본에서 발간된 한국전사에 의하면 1950년 7월 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1기병사단은 바로 그 영동지역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방어전을 폈습니다. 충북 남단 지역을 나란히 방어하고 있던 25시단과 1기병사단은 피란민 때문에 골치를 않았습니다. 임신부가 소형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와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피해를 입었기도 했습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습니다. 미군은 이들 피난민을 쏘아야 할지 실로 난처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신부, 애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때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근리 비극은 이렇듯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문화의 일각일 뿐, 이제 와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전에서 아들을 잃고 있을 때 한국군 장군들은 그렇질 못했고, 미군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을 때 한국군은 대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쫒기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UN안보리는 7월7일 UN군 창설을 결정했고, 7월8일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어린 한국군의 지휘를 부탁했습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킬링필드의 제물이 됐을 것입니다.

3년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4만명의 생명을 잃었고, 10만명이 부상당하거나 실종됐습니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바쳤고,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습니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미군을 향해 저들은 양민학살자라 매도하고,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통일이 됐을 것이라며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소란을 피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박대통령 시절에 온 지혜를 짜내서 미군을 붙들어 두기 위한 고육책으로 한미연합사를 창설했지만 저들은 이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미선이-효순이로 주한미군 모략

2002년12월 저들은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각색하여 전국적으로 반미정서를 확산시켰고, 그 결과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미선이-효순이가 죽은 도로는 좁은 커브-길이고, 공병장갑차는 매우 높고 창이 작아 시야가 매우 좁습니다. 차의 폭은 3.7m, 두 대가 서로 교차했습니다. 두 대의 차폭을 합치면 7.4m인데 도로 폭은 겨우 6.3m였습니다.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 쪽은 산이었습니다. 한 대의 차가 산으로 바짝 부치는 과정에서 차는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교차를 시도했고, 그 와중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장갑차가 앞으로 가면서 뭉개고 뒤로 가면서 뭉개며 악랄하게 죽였다고 방송했습니다. 한 가정 당 2억 이상씩을 받았는데도 저들은 60만원이 웬 말이냐며 국민을 흥분시켰습니다. 방송이라면 무조건 믿는 국민이 하루아침에 혈맹을 배반하는 가장 의리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국군과 미군을 악마의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으로 하여금 군을 증오토록 하는 저들의 심리전 전략인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러한 줄거리를 모릅니다. 개개의 사건에 대해서만 사실과 거꾸로 알고 있으면서 군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벌이는 이런 굿판들은 북한의 전문적이고도 교묘한 심리전 작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군과 민은 하루라도 빨리 깨우쳐야 합니다.    

                 제조 4.3사건에서도 군경을 살인마로 모략

군과 경찰에 대한 모략전은 1948년 4월3일에 발생한 제주 4.3사태에 매우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48년4월3일에 빨치산 김달삼이 소련군 스티코프 중장의 사주를 받아 1948년의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군경가족을 무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살인한 폭동이며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양민이 희생됐고, 그 중에는 억울한 양민도 꽤 많았던 것으로 이해돼왔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당시였던 1999년12월16일에 제정된 특별법에서는 '폭동' 혹은 '반란'이란 명칭이 '사건'으로 바뀌었고, 4.3 '사건'의 정의가 "1947년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공권력이 폭동-반란 세력으로 몰리게 됐습니다. 

김영삼과 386 주사파들이 벌이는 민주화 굿판이 극에 달해 있었던 1996년1월27일, 국회는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시절인 1999년12월16일, 국회는“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별)을 통과시켰습니다.

          동의대에서 타죽은 경찰관 7명은 민주화 방해한 역적으로 모략

1989년5월이었습니다. 부산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학내문제로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전경 5명이 도서관에 감금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했지만 학생들은 이들 경찰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여 경찰관 7명을 사망케 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위참가 학생 전원이 구속되고 주도한 46명은 방화, 살인 등의 혐의로 최고 무기징역이 확정됐으며 학교당국은 81명의 학생을 제적시켰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시절인 2002년4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동의대사건을 일으킨 당시의 중범자 46명을‘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죽음은 민주화를 저지하려다 죽은 반역의 죽음이 된 것입니다.

           역사 뒤집기

저들은 북한 공산집단의 정당성으 확보하기 위해 역사를 끈질기게 변조합니다. 김일성은 87년 11월 29일에는 중동에서 고생하다 귀국하는 근로자 93명을 태운 KAL 858기를 공중에서 폭파시켜 무고한 115명의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저들은 이 역시 안기부의 조작사건이라며 방송 등을 총동원하여 뒤집으려다 실패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에 이르는 3일간에 걸쳐 울진 삼척 산간부락에 무장공비 130명을 3회에 걸쳐 침투시킨 바 있습니다. 2개월에 걸친 군·경 합동작전으로 그중 116명을 생포 또는 사살했지만 당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외친 9살 난 이승복 군을 비롯한 민간인 23명이 그들에 의해 피살 되는 비극을 겪은 바 있습니다. 이 승복이 교과서에서 반공 자료로 활용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저들은 집요하게 이승복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다 실패한 것입니다. 저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공산당을 정당화시키고, 한국정부를 거짓말 집단으로 매도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을 더 신뢰하도록 만들려는 작전의 일환인 것입니다. 
  
              뒤집어 씌우기식 모략전 수법

저들은 폭력소요를 일으키고 그것을 반드시 군경의 잘못으로 뒤집어 씌우는 데 천재적인 작전수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성유언비어-거짓선동-폭력(파괴 방화 살인)-모략(뒤집어씌우기)-집단적 억지주장-역사왜곡에 이르는 일련의 전술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5.18사건과 4.3사건이 정확히 닮은 1란성 쌍둥이이고, 이 선동-소요-모략 과정은 한국에서 일으킨 모든 빨치산 소요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전술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한국 내에서 발생해온 거의 모든 반정부 소요는 제주4.3사건을 기본 모델로 하고 있고, 한국 내에서의 사학 탈취는 상지대학 탈취사건을 기본 모델로 하고, 국가탈취의 기본모델은 베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반공주의자인 티우 대통령의 궁에까지 간첩들이 득실거리고, 학생과 종교인들은 연일 반미 데모를 하여 미국을 쫓아내고, 행정관리들은 사리사욕에만 안주하고, 치안이 무너져 대낮에도 반공주의자들이 암살되고, 국민들에게는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이 없었다.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 국가는 결국 공산당에 패망하게 되었고, 잘사는 사람 700만은 재교육캠프(수용소)로 들어가 고통스럽게 죽었고, 100만은 살겠다고 보트를 탔다가 그 중 10만이 물에 빠져 죽고, 해외로 달아난 사람들은 국적 없는 서러움을 받으면서 풀죽어 살고 있다. 필자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월남 패망의 전야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선동과 모략전술은 사학탈취 과정에서 백미를 이룹니다. 사학이란 교육에 뜻을 가진 인사가 개인의 재산을 투입하여 설립한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참교육을 내세워 ‘협의회’라는 집단을 형성하여 백주에 사학들을 탈취했고 그 수는 30여 개에 이릅니다. 이들 ‘협의회’ 교사나 교수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감언이설과 힘자랑으로 포섭하여 재단이사장을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형상화합니다. “학비를 받아 사채놀이를 한다.” “외제차를 몇 대씩이나 가지고 있다.” “첩이 있다.” . . .
 
포섭된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점거하고 재단이사장의 출근을 저지합니다. 심지어는 이사장 등의 인신을 구속하여 의자에 묶어놓고 계란을 던지고 소방 호스로 물대포를 쏘는 등 그 집단적 모욕 및 학대 행위가 가히 생지옥이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문제를 벌여놓으면 교육부가 관선 이사를 내보내고, 관선이사들은 교수협의회와 한 편이 됩니다. 이에 더하여 이들은 경찰과 검찰에 가짜서류를 만들어 재단이사장을 고소합니다. 검찰이 조사하여 아주 작은 부정이라도 나타나면 이를 확대하여 학교를 가로챕니다. 이것이 빨치산들의 모략전법인 것입니다.(http://www.systemclub.co.kr/)

지만원(시스템클럽 대표)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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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kwj3697    수정

    대한민국 국군에도 좌파가 합법적으로 잠입하여 활동을하고 있다니 가히 심상치 안쿠먼 !! 군은 국가안보의 최후의 보루인데 이모양 만든 원흉은 k대종, no 무인의 10연이 아닌가 본다. 군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완수하는 특수 집단이므로 하루빨리 색출하여 당호한조치를 해야 할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

    2008-11-03 오전 9: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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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파색출제거    수정

    대한민국 국군을 모독하는 좌파의 군 법무관이 군에 침투해 있는것은 좌파정부에 위한 것. 그들을 색출하여 전역시켜야 한다. 대한민국 국군이 무너진다. 막아야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11-03 오전 9: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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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현의 자유    수정

    군법무관 좌파성향을 조사하여 불명예 전역시켜야한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8-11-03 오전 9: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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