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의 교훈을 잊지말자
34년 전 월남을 생각하며 우리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할 때
1975년 4월 30일은 월남이 이 지구상에서 운명을 마감하고 영원히 사라진 비운의 날이다. 월남 티우 대통령이 “월맹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10년 이내에 망할 것’이고 호언했으나 오히려 월남이 월맹군 총공세 40일 만에 항복했으니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인도지나 반도에서 경제적 궁핍과 인권말살의 대명사인 공산주의가 풍요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시장경제 체제를 제압한 5년 후에 세계는 아이러니칼하게도 공산주의가 퇴출되는 대변혁을 하였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 공산권이 사라졌으며 중국도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변신하여 번영의 길에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국의 일부 이념에 편향된 좌파들은 ‘베트남이 통일 됐으니 잘된 것 아니냐’고 강변한다. 이념에 함몰되어 계급사회를 뒤엎는 혁명과정에는 피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악마 같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전쟁이 끝나면 승자가 정의가 되는 특성상 월맹은 점령지에서 종전 36시간 내에 26만 여명의 월남인을 학살했다. 이에 놀란 106만이 바다로 탈출하다가 11만명이 익사하거나 해적에 살해당했고 해외로 망명할 수 있었던 95만여 명은 괄시와 수모 속에 살아야 했다. 남아 있던 지도급인사 350만여 명은 공산화 인간개조라는 정책에 따라 수용소로 끌려가 10여 년 동안에 대부분 맞아죽고 굶어죽고 병걸려 죽어 갔다. 어떻게 이것이 잘된 일인가.
월남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우방의 지원을 받으면서 왜 이러한 비극을 자초했는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경계해야할 극단적 이기주의와 부패,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법치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극심한 내부 혼란과 국력을 쇠잔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주교와 불교계 성직자들이 주동이 된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 단체는 연일 반전, 반정부 시위에 여념이 없었고, 학생들과 일반시민이 가세하면서 사회혼란과 법치가 설 땅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월맹에서 보낸 공산프락치들이 침투하여 시민 데모대를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 선거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의 민족감정에 호소한 선동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 시 ‘월맹(공산주의)과 대화를 통하여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외세를 끌어들여 북폭을 하고 동족끼리 피를 흘리며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라고 민족감성에 호소하여 공산주의 월맹과 화합이 가능한 것처럼 거짓 선동하면서 반전 여론을 고취시켰다. 적전 분열을 획책한 것이다. 그는 월남 패망 후 공산군의 프락치이었음이 밝혀졌다.
미국은 이러한 월남에서 자유·민주의 열매를 맺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1973년 10월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고 연합군과 함께 철군하였다.
월맹군은 자강 의지도 없고 지원군도 철수한 허깨비 세계 4위의 공군력을 가진 월남군을 향해 1975년 3월 총공세를 하여 50일 만에 월남의 항복을 받고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을 달성했다.
월맹은 공산화라는 이념 하나에 목숨을 걸고 동족상잔의 피 위에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공산주의체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하여 경제적 빈국을 벗어나지 못해 피밭에 새워진 이념의 꽃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지도부는 개혁개방을 하였고, 한 때 적이었던 한국을 벤치마킹하면서 2008년도에는 한·베 교역량이 100억 달러를 넘어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념 대립으로 희생당한 400여만 명의 죽음과 숨죽이며 살아가는 수 없는 사람들의 회한은 누가 위로해줄 것인가. 천만금으로도 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34년 전 월남을 생각하며 우리의 처지를 곰곰이 비교해 볼만하다.(konas)
김 규(재향군인회 호국안보국장)
- 관련기사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