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건국은 정당했다
현 정부 들어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인 대한민국의 현대사 바로잡기 작업과 정체성 확보에 나선 것은 다행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는 그것이 오랜동안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나 해방 후 미소 강대국들의 온갖 국제적 간섭과 국내 좌익과 공산당의 악랄한 방해를 이겨낸 힘찬 건국운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훌륭한 창업이었다.
오랜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으로 달성되었다. 대한제국을 잇는 민주공화국으로 자랑스런 독립 운동의 역사와 함께 국민과 영토, 정부와 주권을 가진 나라를 건국했다. 나라에는 건국과 건국일이 있는 법이다. 우리에겐 8월 15일이 건국일이며 광복절과 겹친다. 지금까지는 광복절의 의미를 건국을 빼고 말해 왔다. 이제부터는 국권을 회복한 건국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는 광복절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광복절이라 부르는 1945년 8월15일은 우리의 선열들이 행한 독립운동의 성과로 재평가하여 광복절로 경축하고 있지만, 사실 이날은 우리 스스로 우리 힘으로 국권을 회복한 날이 아니며 얄타밀약(1945.2)으로 한반도는 장차 미·소·영·중의 신탁통치를 받게 할 예정지역이었다. 그리하여 해방후 3년간 이승만의 영도 아래 우리의 민족-건국진영이 모스크바 3상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미소 강대국과 싸웠고, 국내의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익합작노선을 강조한 상해임정세력과 연대한 국내 좌익-공산계열, 끝으로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한 북한공산당과도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니, 5면의 적과 싸운 셈이 되었다. 이 힘겨운 투쟁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해 주어야한다.
해방직후 국내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이 야합한 공산주의세력에 의한 한반도의 적화야욕을 제대로 간파한 유일한 인물이 오랫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이승만이었다. 그는 일찍이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고 공산주의의 본질을 간파하였으며 2차대전 종전 직전에 등장한 동유럽의 공산정권의 수립을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는 좌우익합작정부로 가는 것이며 이는 결국 공산화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하여 처음부터 단호히 반대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상정하도록 미군정과 미국정부를 설득했으며 결국 미소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한 미국정부는 이승만의 견해를 받아드렸다. 이승만은 탁월한 외교로 유엔관찰하의 5.10총선거를 시행하였는데, 유엔선거시찰단이 입경하였다. 5.10선거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이라는 원칙이 지켜진 민주적 선거였다. 좌파의 무장봉기로 선거를 방해한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엔선거감시단은 김일성의 반대로 38선을 넘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신생국가로서 출범했고 초대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가가 성립하려면 당연히 건국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초기 정부수립의 건국세력들은 정부수립을 선포했지만, 건국을 선포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승만 정부가 건국을 선포하지 않은 이후, 어떤 사학자들은 건국은 상해의 재중임정이 선포된 1919년 4월 13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첫째, 상해임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이다. 전시를 통해 친소정책에 일관적인 태도를 보인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둘째 영토와 국민이 없는 건국은 관념상의 개념일 뿐 건국이 아니다. 미국이 연방정부 수립 전 1776년 7월 4일에 선언한 독립을 건국일로 삼는 것은 영토와 국민이 있는 상태에서 행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상해임정은 말 그대로 ‘가건물’처럼 임시정부였으므로 진정한 정부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이승만 정부의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선언하여 북한을 미수복지역으로 했지만 통일의지를 천명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천명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같은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선거감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로 승인하였다. 이 결의안 이후 1950년 3월까지 미국을 비롯하여 26개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이런 외교적 승인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도와 호주 및 캐나다와 프랑스의 정부는 지금처럼 한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아니었다. 신생국 대한민국은 막 태어난 간난아이와 같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에는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북한과 소련의 방해공작은 집요했다. 그래서 승인과정에서 초대 한국외교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만약에 이승만 정부가 유엔의 승인노력을 게을리하거나 유엔승인에 실패했다면, 1950년 김일성이 저질은 6.25기습남침에서 한국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조기 참전을 결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유엔군의 깃발하에 연합군을 결성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미군이 철수된 마당에 서울이 1주일도 안되어 함락되었으니, 미군의 참전이 1-2주일만 늦었어도 한반도의 적화는 불문가지였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국제적으로 승인한 나라이기에,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참전의 대의명분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부의 유엔승인 노력의 성공이 결국 6.25남침에서 나라를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제에 광복직후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두 세력을 주목해야한다. 첫째가 소련과 조선공산당이다. 그들은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오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스탈린이 지명한 김일성을 수반으로 1946년 2월8일에는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공산화를 가속하였으며 남한까지 적화하려고 중공군 팔로군에서 종군한 조선의용군을 북한공산군에 편입시켜서 조직을 정예화하였다. 그들은 미·소공동위원회기간에 공산국가 조직을 끝내고 그것을 굳게 지키기 위해 평화적 남북통일을 가져오게 할 UN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거부하여 남북분단을 영속화 시켰으며 남한공산화를 막게 될 대한민국의 건국을 폭력을 행사하면서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1948년 제주 4·3폭동이었다. 그리고 4월19일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북한에 불러 이른 바 4·30성명을 공동성안해서 김구와 김규식 두 김씨를 대한민국 건국반대의 앞잡이로 이용했으며 그 후 1950년에는 6·25남침으로 동족을 살상하며 남한을 적화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두 번째가 독립운동가이며 애국자 김구의 변신이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대체로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따르다가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암살로 미군정의 조사를 받았고 한민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후 완전히 변심하여 UN감시하의 선거를 반대하며 소련과 조선공산당의 한반도공산화정책에 동조해버렸다. 그는 1948년 4월 김규식과 북한에 가서 이른바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4김이 공동성안한 4·30성명에 도장을 찍고 남한에 돌아와 대한민국 건국반대에 나선 다. 두 김씨는 5월 1일 메이·데이 데모로 평양에서 펼쳐진, 소수의 중공 팔로군이 참가한 북한공산군의 성대한 열병식을 참관하고 3일에 김구는 김일성과 단독면담을 해 남한에 가서 투쟁을 하다가 다시 오게 되면 여생을 보내 게 과수원을 하나 달라고 청하여 약속을 받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김구는 8월14일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 말하였고 그 후 대한민국의 UN승인을 방해하려 했으며 4·30성명을 금과옥조로 미군철수를 끝까지 주장하였다.
김구의 남한내의 단독정부 반대 및 건국무용론은 그 후 남한에서 친북좌파에 의해 계승되어 대한민국이 태어나서 안 될 나라로 선전.선동이 되고 미군철수와 반미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구의 좌우익합작정부 노선은 김대중의 6.15공동선언의 정신으로 계승되었고, 그 제2항에서 거론된 ‘남북연합제도 광의의 의미에서는 김구의 좌우익합작노선의 정신을 일정부문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좌파성향의 현대사학자들과 시민단체에 의해서 김영삼 문민정부-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 15년동안 김구의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김구의 평양행이 미화되었으며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었고, 화폐에도 김구초상화 넣기 운동이 벌어졌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좌파는 본질적으로 친북용공적이며 反韓史觀에 젖어있으며 반이승만(反李承晩)의 특징을 가진다.
아직 미흡하지만 실용주의를 강조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인 대한민국의 현대사 바로잡기 작업과 정체성 확보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konas)
이주천(원광대 사학과 교수/국제현대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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