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무효"
"日 도덕적 사과만으로는 안돼, 국제법적으로 처벌받아야"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과 세계NGO역사포럼(대표 박원철)이 공동주최한‘제 3회 역사NGO세계대회’3일째인 '한·일 NGO 국제학술 세미나'가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평화통일시민연대 주관으로 열렸다.
22일 오전 9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역사적 진실규명과 국제법적 평가」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는 한·일 양국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 날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에 나선 이장희(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한국외대 교수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과 관련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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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미리 배포된 기조연설문『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법적 유효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은 내용적 측면에서도 매국내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합의 자체에도 하자가 있을 뿐 아니라 조약체결 대표에 대한 강박에 의해 체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무효"라고 밝혔다.
또 조약체결절차와 형식면에서도 하자가 있어서 무효라고 했다. 그런데 이 무효에 대한 해석상에 있어 한일 양국이 지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명시된 제2조에 대한 해석이 한국은 대한제국과 일본이 조약을 맺을 당시부터 소급해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무효의 시점을 대한민국이 정부수립을 한 1948년 8월15일 이후로 보고 있어 서로 상이하다고 말하고 "무효인 조약을 근거로 일본측이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한반도에서 취한 1910년 전후 모든 행위들은 부당하고,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36년간 한국은 일본의 강압적인 점령상태 하에 있었으며 국제법상 행위능력은 제한이 되었으나, 한국은 국가의 동일성과 계속성(권리능력)은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은 강박으로 우리의 경찰권만을 박탈하였지만, 우리의 주권은 법적으로 박탈하지 못했다"면서 "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제2조에서 구 조약의 무효확인조항은 결국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부언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이에 따라 한일과거청산에 대해 도덕적 책임뿐만 아니라 법적 책임에도 성실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고 말해 지난 1970년 12월7일 독일의 당시 빌리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해 폴란드 국민 앞에 나치의 범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희생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 법적 조치 및 손해배상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실을 들어 일본의 책임회피식 행태를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 "한일간 과거청산이 오늘까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1945년 일본 동경국제재판소에서 전범자들에 대한 처벌이 되지 못하고 그들 범죄자들이 재등장, 역사를 왜곡하면서 오늘까지 일본의 주체세력으로 됨으로써 한일간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서 "올바른 역사의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유지에도 한일과거청산은 크게 작용하며 이는 진실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말하고 "진실은 처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교훈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다"고 밝혔다.
더불어 "일본은 진실을 기초로 하되 도덕적으로 사과만으로 해서는 안 되고 응당 국제법적으로 처벌되고 그렇게 나가야 한다"며 "한일간의 올바른 역사가 정립되어야만 동북아의 평화도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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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날 이장희 교수가 밝힌 기조연설문 내용임.(설명부분부터 정리)(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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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법적 유효성』
일반적으로 법제법상 조약의 성립 조건은 다음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한다.
1) 조약당사자가 조약체결능력을 가질 것
2) 조약당사자의 대표가 조약체결의 권한을 가질 것
3) 조약체결 대표자간 하자 없는 의사의 일치가 있을 것
4) 조약 내용이 가능하고 적법한 것을 객체로 할 것
5) 일정한 조약성립의 절차를 거칠 것 등이다.
첫째로 내용적 측면에서도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은 매국내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진정한 대한제국의 진정한 의사를 표시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 보아서 이 '한일병합조약'은 합의 자체에 하자가 있으므로 당연히 무효이다.
구체적 과정을 설명하면, 1910년 8월16일에 이완용,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 한 다음, 8월18일에는 이완용으로 하여금 소위 매국각의에서 합의를, 8월22일에는 서울거리에서 일본 헌병을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망을 펴놓고, 순종황제 앞에서 형식만의 어전회의를 열어 소위 한일병합이라는 안건을 매국노 집단인 일본의 괴뢰내각이 결의하여 즉일로 이완용과 사내정곡의 이름으로 한일 병합조약에 조인을 완료한 다음 1주일을 비밀에 붙였다가 1910년 8월29일에 발표하였다. 다시 말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내용상 조약체결대표에 대한 강박에 의해 체결되었기에 무효이다.
둘째로, 조약체결 절차와 형식면에서도 하자가 있기에 무효라는 것이다. 한일병합조약과 같은 주요한 조약은 약식조약이 아니고, 정식조약으로 체결되어야한다. 정식조약의 요건으로는 1)국가원수가 대표(전권위원)을 임명하는 위임장, 2)양국 대표가 서명한 조약문, 3)조약문에 대한 국가원수의 비준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910년 병합조약은 정식조약의 형식을 갖추기 이해서 노력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과 관련하여서는 조칙(詔勅)이 비준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조칙에 서명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형식적 하자가 있는 것이다. 서명의 누락사유는 한국 황제가 병합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한국 병합은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 1911년까지 관례를 보면, 국권과 관련되는 협정에는 비준서 발급뿐만 아니라 위임자의 교부가 필수였으며 이는 국가의 외교업무를 대표하는 직 임을 맡은 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라고 한다. 당시 가장 권위 있는 국제법학자인 L. Oppenheim(1858-1919)도 비준을 조약의 구속력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보았으며, 조약은 원칙적으로 비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승인된 관습국제법의 규칙"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일본학자를 포함하여 국제법학자들이 위와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은 전권위임장도 없는 사람이 체결하였고, 추후 황제의 비준도 없이 체결된 것으로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이처럼 1910년 당시 국제법의 관행, 즉 時際法的(intertemporal) 관점에서도 조약이 전권위임장도 없고, 또 비준도 없으면, 그러한 조약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이 무효라면 언제부터 무효이며, 이를 위해서는 한일양국관계를 정상화시킨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문제로 귀결된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한일 양국 간에 합의 하에 무효선언을 한 것이며 이 무효는 국제법상 원칙과 오스트리아의 선례(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무력적 강박)에 따라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효의 시점에 대해 한일양국은 다르게 해석한다. 한국은 무효의 시점을 국제접상 의미에서 처음부터 당연히 무효(null and void)이기 때문에 이 조항을 체결당시로 소급하여 무효임을 주장한다.
반면 일본정부의 공식적 견해에 따르면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언급된 조약 및 협정들은 '자유의사에 의하여 또는 상호 평등한 지위에서' 체결된 것으로서 체결당시 적법 유효하였다. 그 결과 이들 조약 및 협정은 한국이 독립은 선언하고 일본의 주권으로부터 이탈하였던 1948년 8월15일부터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측은 '한일병합조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합조약은 1948년 8월15일 이후부터 무효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1910년 11월 '한일병합조약'이 무효라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한다. 우선 무효인 조약을 근거로 일본측이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한반도에서 취한 1910년 전후 모든 행위들은 부당하고, 불법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면 1904년 한일 의정서로부터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이 맺어 질 때까지 일본은 국제법상 불법인 무력적 강박을 한국의 황성(皇城)과 내각(內閣)에 가함으로써 여러 가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주권을 탈취하여 갔다.
이리하여 일본은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하였으며,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은 독립하게 되었다. 36년간 한국은 일본의 강압적인 점령상태하에 있었으며 국제법상 행위능력은 제한이 되었으나, 한국은 국가의 동일성과 계속성(권리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강박으로 우리의 경찰권만을 박탈하였지만, 우리의 주권은 법적으로 박탈하지 못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제2조에서 구조약의 무효확인조항은 결국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이에 따라 한일과거청산에 대해 도덕적 책임뿐만 아니라 법적 책임에도 성실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가의 모든 국제의무위반행위로 타국에 손해를 가하였을 때 국제책임을 수반한다. 국제책임은 과거에는 미사책임이 주류였는데, 2차대전후 이래 민사책임과 형사책임을 구분한다. 그래서 국제법상 국가가 국제법 위반 행위는 국제 '불법행위'와 국제 '범죄행위'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제 민사책임으로서 완전한 손해배상 책임을, 후자는 국제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 국제 민사책임인 손해배상책임의 해소 방법에는 원상회복, 금전 배상, 공식사과를 통한 명예회복이 있다. 일본정부는 이 불법침해에 대한 합당한 국내법적 특별법 조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하는데, 독일의 과거 청산처럼 충분한 국제법적 축가책임조치를 국내외적으로 취하지 않고 있다.
국제 형사책임은 1945년 동경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 처벌과 관련하여 제대로 청산을 하지 못했다. 특히 당시 미국은 동북아 냉전대비 패권전략을 위해서 일본천황의 면책, A급 전범 19명의 석방, 일본731부대 세균전 책임자 석방 등 뉘른베르크 독일전범 처벌처럼 철저하게 처벌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범죄는 1968년 UN결의에 따라 시효가 부적용된다. 일본의 전쟁범죄행위자들은 법적으로 지금도 처벌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 이러한 식민지 청산에는 우리 내부에도 책임이 있음을 냉정하게 자성해야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재정립하기보다는 식민지사관에 근거한 기득권에 연연하는 일부 지식인과 이를 동조하는 세력이 문제이다.
광복64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첫 단추를 확실하게 끼우고,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어야 한다. 일제 식민지 강점 및 침탈 관련 한일 관련 조약 및 협정은 국제법적으로 처음부터 소급하여 확실하게 무효임을 재확인하고, 이에 근거한 역사재정립과 그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제2의 광복인 올바른 평화통일로 가는 길임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정부와 국회가 국내외적으로 이제 당당히 선포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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