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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세종시 문제: 박근혜의 오해

국민은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했을 경우 그 약속을 파기하는 정치인·정당을 신뢰한다.

Written by. 양동안   입력 : 2009-10-25 오후 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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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시 건설계획의 수정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내세우는 주된 논거는 ‘약속지키기’이다. 다시 말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우당, 그리고 한나라당이 세종시를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건설하자는 법을 제정했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그리고 야당들이 세종시 건설을 원안대로 약속해왔으므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대주주 중의 하나인 박근혜 의원도 ‘약속지키기’를 이유로 세종시 건설계획 수정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다. 박근혜 의원은 10월 23일 세종시 건설계획 수정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정치는 신뢰인데, 신뢰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문제는 당의 존립에 관한 문제이다”, “이렇게 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무슨 약속을 하겠는가” 등이다.

  인용된 박 의원의 말들이 문법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추리력을 동원하여 그의 발언을 문법에 맞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치활동이 무의미 해진다”, “세종시 건설을 원안대로 추진하느냐 여부는 한나라당의 존립이 걸린 문제이다”, “세종시 건설계획 같은 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무슨 약속을 해도 국민이 믿지 않을 것이다” 등이다.

  박 의원 발언의 키워드는 신뢰이다. 박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세종시 건설계획은 매우 큰 약속이므로 무조건 지켜야 하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여 존립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박 의원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타당하지 않다.

첫째, 그의 발언은 실제 있었던 일들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못하다. 우선 세종시 건설계획은 한나라당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 노 전 대통령과 열우당이 약속한 것이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후보는 충청도 유권자의 표를 잃을까 두려워서 노무현·열우당의 약속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을 한나라당과 이 대통령의 약속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큰 약속이 아니며 그것을 수정(전면 백지화하도 아닌)한다 해서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신뢰가 실추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세종시 건설계획보다 더 큰 약속인 한반도 대운하 건설계획을 파기했지만 그로 인해 국민의 불신을 받아 존립불가능의 곤경에 빠진 일이 없다.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지지율)는 대운하 약속 파기 후 오히려 더 높아졌다. 

둘째,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공공적 신뢰’로서, 민간인들 사이의 ‘사적 신뢰’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타당하지 못하다.  

민간들 사이의 계약은 계약 쌍방 간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에 반해 정치인·정당의 공약은 정치인·정당과 유권자들 간의 협상을 통해 체결된 것이 아니라, 정치인·정당이 유권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민간인들 간의 계약보다 구속력이 약하다. 구속력이 강한 민간인들 간의 계약에서도 불법적인 내용이나 부도덕한 내용의 계약은 이행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계약의 파기는 권장될 사항이지만, 계약의 파기가 계약 상대방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정치인·정당이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한 약속은 구속력이 약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만일 그 약속에 국가이익(전체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요소가 있을 때는 반드시 파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파기했을 경우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지 않는다. 국민은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정당을 불신하고 그런 약속을 파기한 정치인·정당을 신뢰한다. 이것이 ‘공공적 신뢰’와 ‘사적 신뢰’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노무현·열우당은 세종시 건설을 포함하여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실천하다가 국민으로부터 ‘불량 정치인’, ‘불량 정당’으로 인식되어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그 결과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헤매게 되었고 열우당은 사라져버렸다. 그에 반해 이명박·한나라당은 대운하 같은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과감히 파기하여 하락하던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다. 세종시건설법 제정과정에서의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 ‘엉터리 법’을 고쳐야 한다고 과감하게 천명한 김무성 의원도 앞으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국민은 국익에 부합하는 약속만 하고 국익에 반하는 약속은 하지 않는 정치인·정당을 우선적으로 신뢰한다. 그 다음으로는 국익에 반하는 약속을 했을 경우 그 약속을 파기하는 정치인·정당을 신뢰한다.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국익에 반하는 ‘세종시 원안대로 건설’ 약속을 파기하고, 세종시 건설계획을 국가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충청도민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내용으로 합리적으로 변경하여 실천하면, 설사 일시적으로 감정적 충청도민의 불신을 사더라도, 전체 국민(그중에는 이성적 충청도민도 포함된다)으로부터의 신뢰는 강화될 것이다. 박근혜 의원은 이것을 정반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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